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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언더우드家기념관, 언더우드 일가(원두우, 원한경, 원일한) 유품들

younghwan 2012. 1. 2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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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학교 캠퍼스 서쪽 언덕 아래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언더우드家 기념관이다. 지상 1층의 전형적인 20세기 초 미국 주택 양식을 하고 있는 건물로 연세대 설립자인 언더우드 일가가 살았던 주택이다. 이 건물에는 2004년 별세한 설립자의 손자인 원일한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곳으로 그의 사후 한국사회에 기증하여 현재는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곳에는 구한말 선교사로 입국하여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원두우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원한경, 손자 원일한의 유품들을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쳤던 그들의 일생을 되돌아 보게 하고 있다.

 이 곳 언더우드家 기념관에는 구한말 선교사로 입국하여 조선이 국권을 침탈하는 과정을 지켜봤던 원두우가 조선에 입국하면서 준비했던 여러 서적들과 김정호가 만들었던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 등과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했던 그의 아들 원한경과 해방이후 활동했던 손자 원일한이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 설립에 경제적으로 많은 후원을 했던 원두우의 형이 만들었던 다양한 종류의 타자기들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연세대 언더우드家 기념관.


언더우드 일가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

Underwood, Horace Grant(1859~1916).
한국명 원두우. 런던 출생.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스웍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5년 미감리회 H.G.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입국했으며, 광혜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1887년 벽지 전도를 시작하였으며, 서울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다.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를 창설하였고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성서의 번역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하였다.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애틀란틱시티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개화기에 종교, 정치,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현재 마포구 합정동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선교본부 인사기록부(1885년). 미장로회 선교본부의 당시 인사기록부로서 필라델피아 장로교 아카이브에 소장. 원두우 박사의 한국 도착 날짜가 'April 5, 1885'라고 적혀 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서울 고지도(수선전도, 1885년). 1885년, 미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언더우드는 서울의 지도를 입수하여 여러 선교기관과 교회들의 지점을 친필로 기록해 두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수전전도에는 많은 메모들이 남아 있다.


대한 예수교회보 주식(1910년). 언더우드가 발행한 초기 기독교 신문사의 주식.


원두우 박사의 친필편지(1911년). 원두우 박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중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의 회장인 친형 John T.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는 편지를 통해 대학설립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지원을 요청하였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헐버트의 '전환기 한국(1906년)', 원두우 박사가 소장하던 책으로, 원두우와 저린했던 헐버트가 1906년 저술한 한국 책으로 1906년 미국 뉴욕 디블데이 출판사가 간행했다. 이책은 청일전쟁 이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춘생문사건을 거쳐 러일전쟁(1904년)에 이르는 격동기에 자신이 목격하고 체험한 한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적 상황을 '친한적'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다. 언더우드와 함께 개인적으로 고종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에 깊이 관여하였고 그 때문에 이후 일본의 방해로 한국에 귀환하지 못했는데, 1949년 방한했다가 노독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묘지에 묻혔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한불문법서(1881년)와 원두우의 한글 연습장. 언더우드는 한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한 직후, 1881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행된 이 한불문법서를 통해 한국어 학습을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이후에 한영사전과 한영문법서를 최초로 출간했을 때 그 서문에서 한불사전과 문법서의 탁월함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왼쪽은 원두우가 한불사전을 보며 한국단어를 공부했던 한글연습장이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로웰의 '조선'  (1886년). 1886년 미국 외교관 로웰이 저술한 한국 소개서. 로웰은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하여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실업가로 활동하다가 외교관이 되어 일본에서 활동하였는데, 민영익을 수반으로 한 보빙사절단이 1883년 9월 미국에 다녀온 직후 서울을 방문하여 고종황제를 비롯한 정부관료를 만나 한미외교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때 서울과 지방을 여행하며 느낀 것을 정리한 것인데, 풍경 사진과 함께 서방에 처음 소개된 고종사진이 눈에 띤다. 그리피스의 '은둔한국(1882)'. 원두우가 소장하고 있던 책으로 1882년 그리피스가 발행한 한국학 관계 저서이다. 한국에 대해 고대부터 역적인 사건을 편년체로 해설하며 지정학적 위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국과의 관계 등 근대 초기 기독교와의 교류까지 담고 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읽었던 한국 소개서이다.<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원두우 소전(1934). 원두우 박사가 별세하신 후 최초로 정리되어 쓰여진 평전으로서 백낙준 박사가 요약, 정리하였다. 이책은 원두우 박사의 일생을 비교적 짧게 다룬 책으로 다소 얇지만 의미가 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한글과 한국의 선교사들. 미국, 영국 등은 한국에 선교사, 의사, 간호사, 교사, 과학자들을 파견하였다. 이 사람들은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오늘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이들은 루터나 위클리프가 독일과 영국의 자국어 발전에 공헌한 바와 같이 한국어의 발전에 공헌했다고 말할 것이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Underwood, Horace Horton (1890~1951).
한국명 원한경. 서울 출생. 원두우 선교사의 아들로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내한하였다. 1912년 경신학교 교사, 조선신학교 교수 및 교장, 1933년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며 규탄하는 일에 힘쓰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결국 태평양전쟁 때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1945년 8.15광복과 함께 다시 와서 미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한국전쟁에 참전 중 1951년 2월 20일 과로로 별세하였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원한경의 찬송가. 원한경이 사용하던 찬송가로, 1925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출간되었다. 원한경은 한국 지인의 도움을 받아 영어 가사를 한국어로 손수 개작하였다.


원한경의 친필 편지(1930). 원두우 선교사의 외아들 원하경 박사의 친필 편지이다. 그가 직접 쓴 편지들을 통해 수많은 협조자들과 국학의 스승들이 연희전문학교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원한경이 사용하던 한자사전. 1942년 하버드 대학에서 출간된 한자.영어 사전이다. 영어의 한자 독음은 중국어 발음을 다르고 있기 때문에 원한경 박사는 직접 각 단어 옆에 한국어 발음을 적어가며 한자를 공부하였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원한경 박사가 사용하던 영사기. 원한경 박사는 이 영사기로 1920~30년대 한국의 풍물과 연희전문의 건물 및 노천극장이 설립되어 가는 과정을 직접 촬영하였다. 필름은 현재 그의 장손자인 원한광 박사가 소장하고 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한국의 배와 선박(1933년)


옛날 축음기

Underwood, Horace Grant II (1917~2004).
한국명은 원일한이며, 원두우 선교사의 장손자이자, 원한경의 장남이다. 1929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으나 당시 일제말 기독교 박해가 극도로 달해 있었으므로 같은해 12월 부임해 있던 연희대학교에서 강제 추방 당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후 그는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에 미 해군으로 참전하여 활약하였으며, 휴전회담 때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수석 통역관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후와 한국전쟁 후의 연세대학교 학원 복구사업에도 노력하여 연세대학교 재건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04년 1월에 별세하였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원득한, 원일한의 휴전회담 통역 당시의 번역노트
한국전쟁 휴전회담에 통역장교로 활동했던 원일한, 원득한 형제가 전쟁용어 등 회담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들을 한국어로 조심스럽게 번역해 놓은 공책이다. '인권선언', '포로교환', '비무장지대' 등 민감한 군사용어들을 적절한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공책이다.


한국전쟁 관련 서적


원일한의 저서,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의 초고와 한국번역서(2002년). 2002년에 발표된 원일한 박사의 자서전의 초고와 한국 번역서이다. 이 책은 원래 Korea in war, revolution and peace라는 원제로 Devine, Michael J.에 의해 정리돼 발행된 바 있는 책을 한국어로 원일한 박사가 다시 집필했다. 책은 원일한 박사의 한국에서의 성장과정, 한국전쟁, 그리고 한국의 치열한 민주화 과정과 혁명의 역사 등에 대한 체험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꿈꾸며 책을 마치고 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원일한이 사용했던 찬송가


원일한 박사가 사용하던 생활용품. 원일한 박사가 생전 손수 만들어 사용하던 호미와 모종삽 그리고 생활 용품들. 원일한 박사는 한국전쟁 당시 사용하던 토스트기를 200년도까지 사용할 정도로 근검한 인물이었다. 200년 별세할 때까지 사택 전체의 플러그는 여전히 110V였으며 2~30년을 훌쩍 넘긴 가전제품 밖에 없었다. 왼편의 가계부는 원일한 박사 몸에 베어 있던 근검절약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한국이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맞았지만 아끼며 나누는 미덕을 배워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원일한이 사용했던 호미와 지게


원일한의 2차대전 및 한국전쟁 당시 군장물. 원일한은 1942년 6개월간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옥고를 치룬 뒤 강제 추방 당하고, 미해군에 입대하여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UN 대표 수석 통역관으로 활약하면서 휴전회담의 성사를 이끌었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각종 훈장

한글 타자기의 역사와 언더우드.
한글 타자기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제작하여 개인적으로 이용한 것이 최초이며 이후 스미스 프리미어에서 개발을 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1914년 재미교포인 이원익이 영문타자기에 한글 활자ㅏ를 붙여서 한글타자기를 고안하였는데, 이 타자기는 세로로 읽게 찍히는 타자기였다. 이로부터 여러 사람의 고안을 거쳐 1950년 공병우가 한국과 미국 정부의 특허을 얻어 언더우드 타자기회사에서 가로제어 가로읽기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제작, 상용화하였는데, 이것이 실용 한글타자기의 시초이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Underwood, John Thoma(1857~1937).
원두우 선교사의 형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실업인이며 독지가였다. 1857년 영국 런던에서 출생한 뒤 줄곧 영국에서 자라다 1872년 3월에 전가족이 미국으로 이민가는데 함께한다. 그 후 사업이 번창하여 세계 최대의 타자기 생산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 기금확충을 위해 귀국한 동생에게 거금 5만불을 희사하여 연세대학교의 현교지인 19만 320평을 매입하도록 도왔고, 또 언더우드홀(본관)과 치원관의 건축기금을 전담하였을 뿐 아니라 원두의 한국선교생활 전반에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동생 원두우가 연희전문학교를 위해 애써던 이듬해인 1916년에 죽자 크게 애통해 하였으며, 21년 후인 1937년에 별세하였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한글 언더우드 타자기 (1950년). 1949년 송기주에 이어 공병우 박사가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자 언더우드 회사는 그 기술을 도입해 한글 타자기 보급에 앞장섰다.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는 막한 회사의 이익을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을 위해 바쳤다. YMCA사업 및 각종 기독교 선교사업과 경신학교 및 연희전문학교 등의 설립 기금으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원한 것이다. 이러한 각별한 애정은 한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한국 최초의 한글타자기 개발과 대중화에 앞장섰다. <출처:언더우드家기념관>


공병우 한영타자기.


언더우드 타자기(시대순)


연세대 언더우드家 기념관 전경


원두우 목사가 설립한 광화문 새문안교회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된 언더우드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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