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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마지막 왕들의 무덤이 있는 능산리고분과 백제 나성 사이에 위치한 능산리사지는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된 절터이다. 백제는 사비성을 도읍으로 하던 시기에 많은 사찰들을 건립했지만 그 중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이다. 이 사찰은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에 지어졌다는 의견되 있지만, 대체로 백제 성왕의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원 원찰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이 절은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1탑 1금당의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여러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중국으로 부터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청자를 비롯하여, 문서에 해당하는 많은 목간들, 건축자재인 수막새와 암막새, 벼루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조사결과 이 사찰은 원래 제사를 올리던 사당과 강당건물이 먼저 들어섰고, 뒤에 목탑을 비롯한 사찰 건물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부여박물관에서는 최근에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사찰의 건립내력과 역활, 당시의 문화등을 알기 쉽게 전시해 놓고 있다.

백제 중흥의 꿈, 세상에 드러나다, 능산리사지의 발굴이야기
능산리사지는 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 등의 국보급 유물이 출토된 백제 사비시대의 대표적인 사찰 유적이다. 나성과 능산리고분군 사이의 계단식 논에서 1,500년여년전 백제의 보물이 쏟아졌다. 능산리 고분의 모형관을 짓기 위한 배수로 공사에서 여러점의 연꽃무늬 수막새가 출토된 뒤, 국립부여박물관, 한국전통문화학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참여하여 1992녀부터 2008년까지 16년간 총 11차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이 유적이 1탑1금당의 가람배치를 한 백제 시대의 절터임이 밝혀졌다. <출처:부여박물관>



2010년 절터가 정비되고 있을 때의 능산리 사지 절터 모습

능산리 절은 언제 세워졌을까?
능산리 절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사비천도라는 도성 전체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538년 이전이 이미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으나, 5~7차 발굴과정에서 그 실마리를 제공할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능산리 절의 대지조성을 확인하기 위한 트렌치 조사나 중문지 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 등지에서 인물무늬 청자편, 흑갈유 벼루 다리편, 청자 잔편과 같은 6세기 중엽대의 중국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 밖에도 최하층에서 출토된 삼족토기, 개배 등을 통해 6세기 중엽에 능산리 절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부여 능산리사지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능산리 사찰. 옛모습을 확인할 수 없어서 실제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건물터를 기준으로 복원해 놓았기때문에 재현된 옛건물 중에는 나름 신빙성이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무늬 청자, 흑갈유 벼루 다리, 청자잔 조각, 부여 능산리 절터, 중국 남북조. 도자기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중국 남북조시대에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조각, 부여 능산리 절터 대지조성토, 백제


토기조각, 부여 능산리 절터, 중문지 앞 암거, 백제

능산리절, 중흥의 꿈을 뒤로하고 사라지다.
능산리 절은 발굴 정황으로 볼 때 백제가 멸망한 660년에 화재 등으로 일시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출토유물 중 가장 늦은 시기의 유물인 도장무늬토기와 무늬없는.바람개비무늬수막새를 통해 7세기 후기 전반까지도 그 기능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심사역과 외곽사역의 모든 건물지가 한꺼번에 없어지기보다는 중심사역이 먼저 기능을 잃고, 중심사역의 서북지역과 외곽사역은 7세기 후기 전반까지 그 기능을 유지하다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부여박물관>


도장무늬토기, 부여 능산리절터 중심사역과 외곽사역,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토기로 이 절이 통일신라시대까지 그 기능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무늬없는 수막새, 부여 능산리절터, 백제

능산리 절은 어떤 구조로 생겼을까?
능산리 절은 중문-탑-금당-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주위에 회랑을 두른 1탑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가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한 점은 회랑 북쪽에 강당과 연결된 건물이 세워진 점인데 불교제작하던 공방으로 밝혀졌다. 절의 둘레에는 경내로 물이 흘럳는 것을 막기 위한 '∩'자형의 배수로가 설치되었기 때문에 능산리 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다리를 건너야 했다. 배수로 서쪽에는 기와를 구워 공급하던 가마가 확인되었고, 북쪽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기타 부속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부여박물관>


능산리절 건물배치도


연꽃무늬 수막새, 부여 능산리절터 목탑지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복원해 놓은 능산리사지 목탑


연꽃무늬 수막새, 능산리 절터 금당지


재현해 놓은 능산리사지 금당

능산리절 강당에서는 무슨일이 일어난 것일까?
보통 절의 강당은 강론이나 설법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전체가 트여 있는 긴 통칸 구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능산리 절은 강당지를 중심으로 공방 1,2, 불명건물지 1,2의 초기 건물지군이 '∩'자형으로 독특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지 내부는 퇴칸을 갖추고 2실로 분리되어 있다. 서실은 중앙에 신좌로 추정되는 큰 받침돌이 있으며, 동실은 내부에 초석이 없는 통칸으로 트여 있다. 이 건물들은 성왕릉의 축조나 성왕을 추복하기 위해 제사를 담당하던 '사당'으로 추정되며, 567년 목탑이 건립됨에 따라 불교 사찰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지만 일정기간 기존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부여박물관>


연꽃무늬 수막새, 강당지와 공방지


재현해 놓은 능산리사지 강당


공방 건물


연꽃무늬 수막새, 능산리 절터 불명건물지 2


성왕을 모시던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연꽃무늬 수막새, 외곽지역 건물지1와 유물산포지

연꽃무늬 수막새, 외곽사역 능산리절은 어떻게 완성되어 갔을까?
고대 불교 가람의 일반적인 건립과정은 목탑이나 금당이 먼저 만들어지고 중문과 회랑이 축조되며 마지막에 강당이 세워진다. 이에 반해 능산리 절은 초기에 만들어진 건물지의 특수성으로 인해 일반 가람의 건립순서와는 차이를 보인다. 1단계는 강당지와 공방지 1,2, 불명건물지 1,2가 건립되는 시기로 6세기 중반부터 567년 목탑 건립 이전까지이다. 2단계는 목탑의 심초석 매립을 기준으로 목탑, 금당, 중문, 회랑이 차례로 건립되어 본격적인 불교사원으로 기능하는 시기이다. 3단계는 가람 중심부의 주요 건물 보수가 이루어지고, 강당지 북쪽과 서회랑지 서쪽 일대에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기타 부속시설이 건립된 6세기 후반에서 백제 멸망기까지이다. <출처:부여박물관>


능산리사지가 건립된 6세기 전반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사 만들어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절이 여러시기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제사를 담당하던 강당주변부터 시작하여, 목탑과 금당이 세워지고 주변건물이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