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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유물인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정림사지는 도성의 중심지에 위치한 사찰로 경주 황룡사와 비슷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찰이 건립된 시기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로 성왕이 중국 남조 양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도성, 궁궐 등과 함께 도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서 제일 먼저 세운 공공시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정림사의 위치는 백제 궁궐인 사비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읍 구아리 도심에서 정남방향으로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로 도로도 남북으로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나 당나라때 존재했던 투루판의 교하고성이나 고창고성에서도 큰 절이 도심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변으로 광장과 상업지역이 형성되어 있는 것과 비슷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중세 유럽이나 이슬람국가 도시들이 대성당이나 모스크를 중심으로 광장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구조라 할 수 있다.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정립사지는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으며, 고려시대까지 이 지역의 중심사찰로 기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서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며, 그 기와편에 정림사라는 글자가 적혀 있어 이 절이 이름이 정림사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곳에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성왕이 정림사를 세운 목적은 무엇인가?
정림사는 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비시기 대표적인 사찰이다. 성왕은 541년(성왕19) 사비로 천도한 사실을 중국 양무제에게 알리고 사비도성의 국가적인 상징물을 건립하는데 필요한 장인과 화가 등을 지원받아 정림사를 세웠다. 성왕은 국내의 정치적 안정을 통해 훌륭한 덕을 얻고,백제를 포함한 가야제국까지 그 덕이 미쳐 가야가 백제에 복속되기를 기원하였다. 아울러 천하의 모든 백성이 해탈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정림사를 창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정림사'가 새겨진 암키와, 고려


연꽃무늬 수막새, 백제


연꽃무늬 청자항아리 조각, 청자 항아리조간, 청자 대야조각, 중국 남조, 수~당. 성왕이 정림사 를 건립할 때 중국 양나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출토된 청자를 비롯하여 도자기 파편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무늬없는 전돌, 벼루, 백제


그릇다리, 등잔


정림사지. 절터 가운데 남아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 중 하나로 통일신라의 석탑과는 달리 목조건축물을 모방하여 만든 전형적인 초기 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찰은 석탑과 금당, 중문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백제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부여에는 많은 사찰이 세워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림사지 소조상은 원래 어디에 봉안되었을까?
정림사지에서는 100여점 이상의 흙으로 빚은 인물상편이 출토되었다. 소형과 중형의 소조상은 목탑 내부의 벽면을 장식하는데 쓰인 것으로 발원자가 다양한 사람을 거느리고 불교에 귀의함을 나타내는 예불도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출토된 대형 편들은 금당에 봉안된 불상의 파편으로 상각된다. 소조상은 고운 태토를 사용하여 대부분 머리와 몸체를 별도로 제작한 다음 기다란 나무를 꽂아 결합하였다. 소형은 거푸집을 이용하여 만들었고, 중형 이상은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 소조상은 모두 흑색, 백색, 자색 등으로 채색을 하였으며, 황갈유가 시유된 것도 발견된다. <출처:부여박물관>


귀, 부처머리


발, 부처 몸 꾸미개


소조인물상. 소조인물상은 흙으로 빚은 인물상인데, 당시 서역에서 주로 만들었던 불상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남조를 통해서 서역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성왕, 의관제를 정비하다
성왕은 사비천도 후 의관제를 정비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꽃으로 장식하였고, 6품 나솔 이상의 관리들은 은꽃으로 장식하였다."고 전해진다. 은제관꾸미개로 대표되는 의관제는 성왕이 지방통치체제로 삼은 방, 군, 성체제의 확립에 따라 중앙은 물론 지방사회까지 폭넓게 보급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은제관꾸미개, 부여 능안골고분군


사람새김 기와편, 부여 능산리 사지


허리띠꾸미개(부여 능안골 고분군), 금동귀걸이(부여 관북리)


금꾸미개, 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