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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이래로 한.중.일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한반도 서남부 해안을 장악하고 있던 백제는 삼한시대로 이래로 꾸준한 대외교류를 통해서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 왜와 상당한 수준의 교류관계를 가조고 있었으며, 그 중간에 위치한 가야지역과도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북쪽의 고구려, 동쪽의 신라와는 대체로 적대적 또는 비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신라와의 한가유역 쟁탈전에서 실패한 이후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중국,왜와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부여로 수도를 옮긴 성왕은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남조의 양나로부터 많은 제도와 문물을 받아 들였으며, 이를 왜에 전파하였다. 부여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토기, 자기, 벼루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왜와의 적극적인 교류의 결과로 왜계 유물이 출토되기도 한다. 또한 일본에서도 많은 백제계 유물이 출토되며, 백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건축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들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남북조의 문물을 받아 왜倭에 전하다.
성왕은 중국의 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불심천자로 불리는 양무제를 위해 대통사를 창건하였으며, 534년(성왕12)과 541년(성왕19)에는 양나라에 거듭 사신을 보내 열반경의 경전을 구하고, 시경에 정통한 학자와 장인.화가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폭넓은 중국과의 문물교류로 사비지역에서는 오수전, 개원통보와 함께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은 토기, 자기, 벼루, 전돌, 소조상 등이 출토되었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은 각종 도량형기도 발견되었다. 한편 왜에는 백제의 선진문물을 전하였으며, 교역이 이루어짐에 따라 국내에서 왜계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출처:부여박물관>


벼루, 부여 금성산, 백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벼루로 비슷한 형태의 유물들이 중국에 많이 남아 있다.


흑갈유완, 부여 부소산성, 수~당. 유약을 입힌 도자기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도 도자기를 만들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녹유로 만들어진 그릇 등은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녹유그릇받침(부여 금성산), 녹유벼루(부여 부소산성), 백제


네귀달린 항아리, 부여, 백제


네귀달린 항아리, 부여, 백제


'대통'이 새겨진 도장글씨 기와, 부여 부소산성, 백제


돌추, 홍성 산금성, 백제


자(복원품), 자, 부여 쌍북리, 백제


부피를 재는 그릇(복제품), 부여 쌍북리, 백제


부피를 재는 그릇, 부여 화지산, 백제


연꽃무늬 전돌, 부여 성동리, 백제


금.은.동 일근 주조품(재현품)


오수전(부여 동나성, 중국 수), 개원통보(부여 부소산성, 중국 당)


귀때단지, 논산 연산면, 백제


뚜껑접시, 논산 육곡리, 백제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호랑이모양의 남자용 요강인 호자이다. 중국 남북조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호자는 어디에 쓰였을까?
호자는 중국 남조 문물의 영향을 받은 호랑이 모양의 남성용 요강이다. 호랑이가 앞다리를 세우고 상체를 들어 얼굴을 왼쪽으로 돌린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으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도록 등 부분에 손잡이가 달려있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는 황제가 행차할 때 시중을 드는 하인이 호자를 들고 뒤따랐다는 내용이 전해온다. <출처:부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