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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경주 명활성 (사적47호), 경주와 동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던 산성

younghwan 2012. 6. 1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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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인 명활성은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로 주로 동해안과 경주를 연결해 주는 교통로인 4번국도가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천(알천)이 평지로 접어드는 입구이기도 하다. 명활성은 주로 동해안을 통해 접근해 오는 왜(倭)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산성으로 이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 기록에는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전 시기부터 동해안을 통한 왜군의 침입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내물왕의 아들을 왜(倭)에 인질로 보내고, 박제상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왜(倭)와 신라의 관계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명활성은 진흥왕 15년(554)에 돌로 다시 쌓은 석축성의 형태로 크게 개보수하였다고 하며, 그 때 쌓은 석축의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명활성은 초기 성벽의 형태인 토성이 5km,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석성이 4.5km로 전체 10km에 이르는 큰 성벽으로 방어가 용이한 능선에는 토성을 그대로 두고 계곡이나 방어에 취약한 곳을 석축으로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남하하는 고구려의 압력이 심했던 5세기에는 궁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며, 선덕여왕 때에는 비담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명활산 계곡 중간에 석축을 쌓은 명활성 성벽. 명활성 석축은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이 곳은 남아 있던 일부성벽을 보완하여 옛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석축은 꽤 큰 자연석을 다듬어서 2층으로 쌓았는데, 석성과 토성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명활성은 발굴과 복원작업을 진행중인 것으로 보이며, 성벽을 쌓았던 옛 석축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명활산 능선을 따라서 석축을 쌓았던 것으로 보이며, 능선을 오르는 길 옆으로 석축에 사용했던 돌들이 흩어져 있다.


땅에 묻혀 있던 명활성 석축에 사용되었는 큰 석재들


명활성 성벽


성벽 윗부분은 토성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명활산 동쪽 능선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명활성 석축


성벽 안쪽으로도 석축을 쌓아 놓고 있다.


명활성 서쪽편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


능선을 따라서 성벽을 쌓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흔적은 잘 보이지 않고, 멀리서 보면 능선길이 토성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서쪽 능선에서 보이는 명활산


명활산성 입구


명활성 북쪽을 흐르는 경주 알천이라고 부르는 경주 북천. 계곡에서 평지로 접어드는 곳에 명활성이 자리잡고 있다.

경주 도심을 향해 서쪽으로 흐르는 알천(북천). 경주는 월성 남쪽의 남천, 서쪽의 형산강, 북쪽의 알천이 자연스럽게 해자를 형성하고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쉬운 지형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경주 명활산성비, 551년, 경주 명활산성. 551년 11월 중에 명활산성을 쌓고, 거기에 관여한 지방관, 역부를 동원한 지방의 촌주, 공사의 실무자와 공사내용, 비의 위치, 공사기간, 비문을 작성한 사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비는 신라의 금석문 가운데 군郡이란 표기가 나오는 최초의 것으로 군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귀중한 자료이다. 이 밖에도 통일기 이전 신라의 신분제와 관등제, 역역동원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주 명활산성, 사적 47호, 경주시 천군동
이 성은 경주 보문호 남쪽에 위치하는 명활산을 둘러싼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토성(5km)과 석성(4.5km)이 함께 있다.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이 성을 공격해 왔으나 격퇴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산성은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자비왕 18년(475)에는 명활산성을 궁성으로 사용하였다가 소지왕 1년(479)부터 월성으로 다시 옮겼다. 선덕여왕 때에는 비담 등이 이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관군에게 평정되었다. 1988년 성 주변에서 진흥왕 12년(551)에 만든 명활산성 작성비를 발견하여 당시의 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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