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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년)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재위 초기인 642년에는 친히 신라를 공격하여 40여성 빼앗는 등 신라에 큰 타격으로 주었다.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와 당나라의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는 등 내.외적으로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는데 힘썼다. 만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다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포위되자 웅진성으로 피신했다가 항복아여 태자와 함께 당나라에 압송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신라군이 육로로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군대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결사대를 격파했으며, 당나라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인문이 이끄는 연합군이 금강수로를 이용하여 사비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백제의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비로하여 72주 52현을 두었으나 후에 신라에 밀려났다.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대 유물로는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집단의 일원이었던 사택지적이 절과 탑을 짓고 세운 사택지적비가 있으며, 백제를 점령한 당군들이 남겨 놓은 흔적으로 당나라군 낭장이었던 유인원의 공을 기록한 당유인원기공비가 부소산성에서 발견되었으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백제를 평정한 업적을 각자로 새겨놓고 있다. 또한 태자였던 부여융과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흑치상지의 묘지가 중국에 남아 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은 백마강과 함께 망한 왕조의 도읍이 주는 쓸쓸한 느낌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또다른 수도였던 공주는 지역에서 행정의 중심지로 약간은 번잡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반해서 부여는 한적한 시골의 읍소재로서 옛 왕조의 수도였음을 보여주는 부소산성 등을 제외하면 논.밭과 농민들이 오가는 작은 소읍분위기가 조선의 수도 서울과 대비되어 더 쓸쓸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고려.조선시대에도 마찬가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 느낌을 적은 시나 문장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백제 대좌평 사택지적은 누구?
일본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에는 642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대좌평 지적'이 등장한다. 그는 사택지적비에 등장하는 '내지성'에 사는 사택지적'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대좌평은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었고 사택 가문은 백제의 유력한 귀족이었다. 지적은 최고 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654년, 절과 탑을 짓고 사택지적비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아름다운 글씨체와 유려한 비문은 이들이 매우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였음을 보여준다. <출처:부여박물관>



사택지적비(복제품), 부여 관북리


사택지적비에 새겨진 글씨

해동증자 의자왕, 의자왕은 어떤 사람이었나?
백제 31대 의자왕은 641년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660년 멸망할 때까지 백제를 다스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자왕은 웅위하고 용감하며 결단력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해동의 증자로 일컬어졌을 만큼 효성스럽고 형제 사이에 우애가 깊었다. 아들 부여융의 묘지에는 과단성 있고 침착하며 사려 깊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은 무왕 33년(632) 장년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어렵게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후 왕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단호히 제거하였고, 신라를 공격하여 군사적 요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는 등 강성한 국력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재위 15년 즈음부터 궁궐을 호화롭게 짓고 연회를 즐기며, 오랫동안 신임했던 충신을 유배 보내는 등 실정을 일삼아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부덕한 군주가 되고 말았다. <출처:부여박물관>


부여융 묘지(복제품), 중국 낙양 북망산. 의자왕과 태자는 당나라로 끌려가서 비교적 무난한 말년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으며, 태자 부여융의 묘지와 흑치상지의 묘지가 중국에 남아 있다고 한다.

멸망한 백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660년 7월 의자왕이 항복하고 백제가 멸망하자 왕과 태자, 왕족과 고위 관료 등 1만여 명이 당나라에 잡혀갔다. 남은 백성들은 왕족이었던 복신과 승려 도침, 왜국에서 돌아온 왕자 부여풍, 장수 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임존성, 주류성 등을 주요 근거지로 하여 신라와 당 연합군에게 거세게항전하였다. 그러나 지도층이 분열됨으로써 크게 힘이 약해졌으며, 663년에 마지막 근거지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에 실패하였다. 부흥운동은 무위로 돌아갔으나, 이로 인해 백제 땅을 점령하려는 당의 전략은 좌절되었다. 멸망 후 백제 사람들의 일부는 일본이나 당나라로 가서 새롭게 뿌리를 내렸지만 대부분은 백제 옛 땅에서 신라의 통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백제 유민들은 신라의 차별 정책 속에서 백제의 후예라는 강한 의식을 가졌고, 이는 오랫동안 이어져 9세기말 ~10세기 초 후백제가 등장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출처: 부여박물관>


당유인원기공비 탁본. 유인원기공비는 백제가 멸망했을 때 당나라 군의 낭장이었던 유인원의 공을 기록한 비석이다. 부여 부소산성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비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을 정확히 판독하기 어렵다. 백제 부흥운동이 평정된 663년에 세워졌으며, 의자왕이 항복한 후 거세게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금석문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당유인원기공비편, 삼국시대 663년, 부여 동남리

신라와 당나라는 왜 힘을 합쳤을까?
의자왕은 즉위 직후부터 활발히 신라를 공략하는 한편, 고구려와 적극적인 동맹외교를 추진하였다. 고립된 신라는 당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당나라는 먼저 백제를 쳐서 고구려의 배후를 도모하려는 전략으로 신라와 연합하였다. 의자왕은 처음에는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적극적인 외교로 인해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음을 깨닫지 못하고 당나라에 대한 외교를 점차 소흘이 했다. 백제는 결국 신라와 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을 맞게 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정림사지 오층석탑 각자 탁본. 정리사지오층석탑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으로 세운 석탑이라는 오해를 낳게 한 각자이다. 원래 있던 오층석탑에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정림사지 석탑 1층에 새겨져 있는 글은 660년 당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적을 기념하여 새긴 것이다. 남쪽부터 서,북,동면으로 돌아가며 네 면에 새겼다. 승리한 당나라의 시각에서 지어졌지만 백제 멸망의 역사를 알려주는 당시의 금석문 자료로서 의미 있다. 같은 내용의 글이 부여 석조에도 일부 새겨져 있다. <출처:부여박물관>


금석청완, 조선후기.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글은 당 학사 하수량이 짓고 권희소가 글씨를 썼다. 이 글자는 '당평백제비'라는 이름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으며, 이를 소재로 글을 짓거나 글자를 탁본하여 소장하는 경우도 많았다. <금석청완>은 역대 고금의 금석문을 시대순으로 편집한 탁본첩이다. 정림사지 석탑 각자는 첫머리 제목 부분만을 수록하였다. <출처:부여박물관>


흑치상지 묘지 탁본(영인본), 중국 낙양 북망산.

흑치상지(630~689)는 백제의 장수였다. 백제가 멸망할 때 의자왕과 함께 항복하였으나 의자왕이 갇히고 당 군사들이 약탈을 행하자 세력을 모아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663년 당 장수 유인궤의 회유로 투항한 후 임존성을 함락시켰으며, 당나라로 가서 활약하였다. 흑치상지에 대해서는 <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 등의 열전, <당평백제비>,<당유인원기공비> 등에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묘지는 그의 생애는 물론 백제 유민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로 주목된다. <출처:부여박물관>

고려.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의자왕과 백제
고려시대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이전 시대의 역사서가 간행되어 백제사 인식의 근간이 되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의자왕이 신라와 당의 외교 정세에 소흘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고려말에는 낙화암, 조룡대 등 부여의 사적을 매개로 백제 역사를 회상하는 글이 많이 지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질서와 가치에 따라 성충, 흥수, 계백 등 백제의 마지막 충신들에 대한 평가가 중시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동국사략, 유희령, 조선


동사강목


백제전성도 동사강목, 안정복, 조선. 조선후기 실학자 안정복이 편찬한 역사서이다. 성리학적 정통론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계통적으로 서술하고자 하였다. 또한 맨 앞에 각국의 전세도와 다양한 역사 지도를 수록하는 등 지리와 강역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특히 백제 전성기의 강역을 황해도 남부에서 경기, 충청, 전라를 아우르고 강원도 춘천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백제를 강성한 나라로 평가한 것은 안정복에게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출처:부여박물관>


부여현,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이행, 1530년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에?
부소산 북쪽 백마강가에 있는 낙화암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비 도성이 함락될 때 궁인들이 투신했다고 하여 '타사암'이라 불렸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문인들의 글에 전설과 함께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궁녀의 수를 삼천으로 언급한 글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문인 김흔이 지은 <낙화암> 등의 시구에 '삼천'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이는 백제 멸망의 역사를 극적으로 묘사한 시적 표현으로 여겨진다. <출처:부여박물관>


석성으로 부임하는 이자인을 보내며, 석주집, 권필, 조선

"부소산은 금강을 베고 흐르나니
 고란사 아래 배에 오르던 때 생각난다.
 그대 가거든 가버린 나라의 자취 보시라
 지금은 봄풀만 우거져 시름에 감기게 하리." <출처:부여박물관>


백마강, 신독재선생전서, 김집(1574~1656년), 조선

"백제 왕업 어디가고 부소산만 남았는가
 백마강 찾은 길손 문득 시름이 이네그려
 반월성은 텅텅비어 봄마저 적적하고
 고색창연 낙화암은 아득한 꿈이어라
 사람들은 생각있어 옛일 두고 상심하지만
 무정한 저 강물은 몇 년 세월 보냈던가
 이 역사를 전철 삼아 다시 밟지 않는다면
 금강 따라 중국 배가 어찌 다시 오겠는가." <출처:부여박물관>


부여회고, 추강집, 남효온(1454~1492년), 조선

"여우 우는 불길한 조심에 재앙이 숨었더니
 흥수의 충성흐런 말만 해와 달처럼 빛났네
 우습구나 장님 귀머거리처럼 모두 살피지 못하고
 임금 신하가 술에 취해 태평 술잔 돌렸네." <출처:부여박물관>


낙화암(복제품), 속동문선, 김흔 (1488~?). 김흔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문장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낙화암>은 전설과 함께 백제 멸망을 회고하는 시이다.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궁인들을 '삼천가무'로 표현하였는데,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역사를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부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