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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 서울에 남아 있는 전통신앙 관련 사당

younghwan 2012. 11. 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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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당(國師堂)은 국수당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뒷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동신을 모시는 마을 제당이다. 국사는 한자로 國師로 표기하는 하지만 한자에 담긴 뜻과 같지 않고 단순히 한자로 기록하기 위해 음을 취한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국사당이라는 말보다는 국수당, 국시봉, 국수봉 등 다양한 형태의 발음으로 나타난다. 국사당은 우리나라 중서부 해안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천신이 하강한 장소라는 의미의 천신사상과 관련되어 있으며, 산신당이나 서낭당 등 신당보다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 남아 있는 전통신앙과 관련된 사당인 인왕산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선바위가 있던 인왕산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산에 국사당이 세워진 것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지 3년째 되는 해로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정하면서, 경대부 및 선비와 서민들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국사당에는 고려 공민왕, 무학대사, 나옹선사를 비롯한 여러 신상이 걸려 있었으며, 민간신앙에서 숭상하는 다양한 신상을 걸어놓고 기도를 올렸다고 하며, 국가적으로도 이를 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국사당이 일제강정기 이후 인왕산으로 옮겨지면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 태백산 천제단 등과 함께 한반도의 전통신앙이 남아 있는 곳으로, 서울의 명산인 인왕산 정상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인왕산 국사당 주변으로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선바위를 비롯하여 무속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인왕산 국사당, 서울 종로구 무악동
이 사당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곳은 목멱신사로도 부렸다. 경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이곳은 나중에 굿당으로 변하였는데, 헌종 대 학자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는 국사당이란 명칭과 함께 현존하는 무신도의 기록이 있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때 일본사람들이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 위치로 옮겨 지었다. 자연 암반 위에 아담한 맞배집을 세웠다. 본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옮긴 뒤에 양쪽에 한 칸씩을 첨가하여 5칸이 되었다. 이곳은 조선후기 관청에 소속된 장인의 간결한 솜씨를 보여주는데, 명확한 건립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당 안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된 무신도가 걸려 있는데 그 솜씨가 다른 무신도에 비해 뛰어나다. 지금도 이곳 국사당을 무대로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같은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사당 뒤로는 무할대사 또는 태조 부부의 모습이란 전설이 깃든 선바위가 있고, 암자도 여럿 있어 명당 인왕산의 면모를 보여준다. <출처:서울시청>


인왕산 서울성곽 서벽 바깥쪽에는 조선시대 서울의 대표적인 민속신앙관련 사당이었던 서울 남산에서 옮겨온 국사당과 선바위를 비롯하여 전통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사찰들이 들어서 있다.


국사당 들어가는 길 입구에는 근처 사찰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일주문이 있다.


국사당을 오르는 골목길. 주위에는 일반가옥이 아니라 주변 사찰과 관련된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인왕산 자락의 큰 바위에 세워진 국사당 오르는 좁은 골목길


원래 서울 남산에 있던 것을 일제가 신사를 세우면서 국사당을 선바위가 있는 이곳 인왕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원래 앞면 3칸에 맞배지붕으르 하고 있던 건물로 이곳으로 옮기면서 양쪽에 1칸씩 늘렸다고 한다. 남산에 있던 전통신앙관련 사당으로 그 내력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서울을 대표하는 국사당 건물로 관청에 속했던 목수가 지어서 그런지 다른 사당건물에 비해서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팔각정이 세워져 있는 서울 남산의 국사당 옛터


국사당 현판과 단청.


국사당 마당에 세워진 장승


인왕산 자락 바위에 축대를 쌓고 국사당 마당을 조성해 놓고 있다.


국사당 뒷편 인왕산 오르는 길


국사당 뒷편 선바위 오르는 길


선바위 아래에서 내려다 보이는 국사당.

선바위
이바위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이라고 불린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 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바위가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설화와 태조 부부의 상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이 바위 곁으로 옮긴 뒤부터는 이 바위와 국사당이 함께 무신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으로 천도할 무렵 선바위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하였고 정도전은 성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었다고 한다.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하여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인왕산을 볼 때면 이 바위가 가장 눈에 띄는데 조선 초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인상깊게 보았다는 것이 이 설화에 나타난다. <출처: 서울시청>


인왕산 자락의 대표적인 기도처인 선바위.


승려가 참선하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선바위라 부르며, 아이를 갖기 원하는 부인들이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이 바위의 모습이 무학대사의 모습이라고도 하며, 태조 이성계 부부라고도 한다.


선바위 아래 기도를 올리는 제단


선바위에서 내려다 본 인왕산 성벽 바깥쪽 풍경


선바위 동쪽편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또다른 기도 장소인 마애석불이 있다.


이곳에는 마애석불과 선바위, 국사당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사찰들이 여럿 들어서 있는데, 대체로 전통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인왕산 자락 숲속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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