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고려 조선 유적_왕릉

구리 동구릉, 문조.신정왕후 수릉과 문종.현덕왕후 현릉

younghwan 2013. 1. 7. 15:00
반응형


 구리 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모신 건원릉 비롯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 조선후기 중흥을 이끌어낸 영조를 비롯하여 아홉기의 왕릉이 모셔진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동구릉에는 조선왕조가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인 건원릉도 있지만, 사실상 마지막으로 조성한 왕릉인 수릉도 동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동구릉 입구에 위치한 수릉은 조선 24대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추존왕 문조는 순조의 맏아들로 효명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정조 사후 권문세가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세도정치기에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하면서 선정을 펼쳐서 좋은 평판을 받았던 인물이고, 그의 비 신정왕후 조씨는 대왕대비로서 흥선대원군을 후원하면서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을 억누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수릉은 구한말 권문세가를 몰아내고 고종이 즉위할 수 있도록 크게 뒷받침한 신정왕후과 효명세자 시절 인심을 크고 얻었던 추존왕 문조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왕릉으로서 선대의 왕릉에 비해서 잘 정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조.신정왕후 수릉
문조(1809~1830)는 제23대 왕인 순조의 아들이며, 제24대 헌종의 친아버지이다. 문조는 세자가 된 후에 돌아가셔서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추존 왕이 되었다. 문조와 그 무덤을 지칭하는 이름이 많이 있는데 1830년 돌아가신 후에 이름을 효명세자라고 올리고, 무덤의 이름도 연경묘로 불렀다. 1834년(헌종 즉위년) 아들인 헌종은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능이름도 수릉으로 높였다. 그후 1875년(고종12) 문조의 비 신성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익종을 문조로 함께 높이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조의 비 신정왕후(1808~1890)는 12세에 효명세자의 세자빈이 되었고, 1834년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26대 왕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생존하였다. 신정왕후는 오랜 기간 조선 정계에 관여하고, 친정 인물을 다수 등용하며 19세기 세도정치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문조 수릉은 1830년 연경묘로 조성되었를 때 서울 성북구에 있는 경종 의릉 근교에 있었다. 이후 1846년(헌종12) 풍수 문제로 경기도 양주시로 옮겨지고, 1855년(철종6)에 이곳으로 옮겨져 동구릉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현재의 수릉은 1890년 신정왕후와 문조가 함께 묻힌 합장릉 형태로 조성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조선 24대 헌종의 아버지로 효명세자로 널리 알려진 추존왕 문조와 구한말 조대비로 알려진 신정왕후를 모신 수릉이다.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을 적극 지원하여 안동김씨 등 권문세가를 몰아내고 구한말 세도청치을 끝내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수릉은 원래 성북동 의릉 부근에 있었는데, 구한말 풍수문제 등의 이유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구한말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동구릉 입구 부근에 위치한 수릉으로 들어가는 길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수릉은 구한말 철종대에 이곳에 조성되었다고 하며, 수릉 정자각은 서삼릉에 있는 철종의 능인 예릉과 함께 조성왕실이 조성한 마지막 왕릉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지어진 정자각 건물 중 하나로 규모 있게 잘 지어진 건물이다.


정자각 내부


수릉은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합장릉으로 조성된 경우는 많지 않으며, 대부분 부부간의 금실이 좋은 것으로 평가를 받는 왕과 왕비가 하나의 무덤에 합장된다. 문조와 신정왕후가 이곳에 합장될 수 있었던 것은 문조가 효명세자 시절에 좋은 평판을 받았으며, 신정왕후가 구한말 세도정치를 끝내는데 적극 후원하여 왕권을 다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을 후대 사람들이 좋게 평가했기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권력이 세어야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좋은 평판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으로 중종과 갇히 묻히기를 희망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자신의 바램과는 달리 태릉에 따로 묻힌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봉분 앞 비각.


동구릉 수릉 전경


동구릉 수릉을 지나서 건원릉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숲길

동구릉 입구에서 수릉을 지나면 세종대왕의 맏아들로 훈민정음 창제를 돕고, 세자시절 많은 업적을 남긴 조선5대 문종의 현릉을 볼 수 있다. 현릉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봉문이 능선에 나란히 배치된 동원이강릉이다. 문종의 능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으나, 현덕왕후는 왕비가 되기 전에 단종을 낳은 후 곧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안장되었가 이후 단종의 복위사건으로 세조가 다른 곳에 옮겼다가 중종 8년(1513)에 이곳으로 옮겨 조성했다고 한다.

문종.현덕왕후 현릉
조선 제5대 왕인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은 세종의 맏아들이며, 단종의 친아버지이다. 문종은 1421년(세종3) 왕세자가 되었고, 1450년 세종이 돌아가신 해 왕위에 올랐다. 임금자리에 있던 기간이 짧았지만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여러 책을 간행하였으며 39세의 젋은 나이에 경복궁 강녕전에서 돌아가셨다. 현덕왕후(1418~1441)는 1437년(세종19) 세자빈에 오르고, 1441년(세종23) 단종을 낳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실때 시호를 '현덕'으로 삼아 현덕빈으로 불리다가 문종이 즉위하면서 '현덕왕후'로 추승하였고, 무덤의 이름을 소릉으로 정하였다. 본래 현덕왕후의 능은 1441년에 경기도 안산 지역에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문종과 현덕왕후의 아들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후에 현덕왕후의 집안에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현덕왕후를 폐위시켰다. 그 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1513년(중종8)에 현덕왕후의 훼손된 무덤을 현 지역으로 모셔 문종 현릉과 동원이강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를 모신 현릉.


현릉은 문종과 현덕왕후가 능선에 나란히 모셔진 동원이강릉이다. 현덕왕후는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다가 죽었다. 원래 경기도 안산에 능이 모셔졌으며, 단종이 폐위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중종대에 이르러 문종의 능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릉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현릉 참도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직선으로 연결되지 않고 'ㄱ'형태로 꺾어져 있다.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현릉 정자각


정자각 앞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수복방


정자각 내부


봉분 앞 비각


정자각 뒷편 문종의 봉분


동쪽편 능선에 조성된 현덕왕후 봉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