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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서울 삼전도비(사적101호), 병자호란 패전의 치욕적인 상징물

younghwan 2013. 1. 14.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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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동쪽편에 위치한 삼전도비는 병자호란에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조선에 요구하여 세운 전승비로 치욕적인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세 패전한 인조는 청태종에 땅바닥에 머리를 9번 찧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루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정식명칙은 "대청황제공덕비"로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 5.7m로 거북받침돌 위에 대리석으로 세운 비석에 앞면에는 만주어, 몽골어로, 뒷면에는 한자로 글자를 새겨 놓고 있다. 원래 한강 나루터 인조가 항복했던 장소에 세워졌던 것을 치욕의 역사물이라는 이유로 1895년 청일전쟁 이후 고종이 강물에 수장시켰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다시 세웠고, 해방 이후 다시 버려졌던 것을 여러장소로 옮겨다니다 1980년대 송파대로 확장시 석촌동 주택가 공원에 세워졌었다. 현재는 원래 위치를 고증하고 문화재 경관 심의를 거쳐 잠실동 석촌호수 동쪽편으로 2010년 4월에 이전하였다.

 조선중기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와 조선이 급속히 쇠약해졌을 때 급속히 성장한 만주족은 후금을 건국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조선과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광해군 재위기간 동안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 적절히 대응하여 위기를 넘겼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인조와 서인정권은 후금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침으로써 양국간의 긴장은 높아졌다. 후금은 1627년(인조5년)에 광해군을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정묘호란 때 조선은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는 등 수세에 몰렸지만 후금 또한 장기간 출병에 부담을 느껴 강화조약을 맺고 철수 하였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내몽고를 평정한 후 청태종이 직접 10만대군을 이끌고 1636년 12월에 전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청태종이 이끄는 청나라군은 유사이래 볼 수 없었던 빠른 속도로 압록강을 도하한지 거의 12일만에 한양에 도착하여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병자호란 때 보여준 청나라군은 전략.전술적으로 매우 뛰어났으며 전국적으로 모여든 근왕병들을 많지 않은 병력으로 각개격파하여 인조를 남한산성에 고립시켜 두말만에 항복을 이끌어냈다.

삼전도비, 사적 101호, 1639년(인조17), 서울 송파구 잠실동 47
이 비는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나라 태종의 요구로 세운 비석이다. 정식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이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 지명을 따서 삼전도비라고 지었다. 도성에서 송파에 이르는 한강나루였던 삼전도는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70년대 이후 한강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비석의 원래 자리는 석촌호수 인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석은 대리석 계통의 돌로 만들어졌다.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을 세우고 위에는 이수로 장식했다.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 비석 앞면은 만주글자와 몽골글자로, 뒷면은 한자로 새겨 17세기 세 나라의 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내용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행위를 공덕으로 찬미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1895년(고종 32)에 강물속으로 쓰러뜨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인 1913년 다시 세웠다가 1956년에 묻어 버렸다.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나면서 다시 세웠다. <출처:서울시청>


서울 송파구 주택가 공원에 세워져 있던 것을 2010년에 놀이공원 롯데월드가 있는 석촌호수 동쪽편으로 옮겨졌다. 현재의 위치는 고증을 통해 인조가 청태종 앞에서 머리를 9번 찧고 항복을 했던 한강나루터로 추정되는 장소라고 한다. 삼전도비는 원래 비석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북받침돌과 비석과 새로만든 비석받침돌 위에 세운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나란히 놓여 있다.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 비석 몸돌. 앞쪽에는 오른쪽에 만주어로, 왼쪽에 몽골어로, 뒷면에는 한자로 내용이 적혀 있다. 비석에는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한 사실이 적혀 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오준이 글씨를 썼다고 하며 여이징이 제목을 쎃다고 한다. 비문을 지은 이경석은 후에 송시열로부터 비문을 지었다고 공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삼전도비 이수. 용이 뒤엉켜 있는 전형적인 중국풍 비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수부 아래에는 만주어로 쓰인 비석의 제목을 확인할 수 있다.


만주어와 몽골어로 쓰여진 앞면 비문의 내용은 자세히 봐야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삼전도비는 한자, 몽골어, 만주어로 같은 내용이 적혀 있어서 17세기 당시 만주어, 몽골어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한자로 적힌 "대청황제공덕비大清皇帝功德碑"


같은 내용이 뒷면에 한자로 적혀 있어서 로제타석처럼 당시 만주어, 몽골어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패배를 상징하는 삼전도비


삼전도비 거북받침돌


옆쪽에 있는 거북받침돌.


대리석으로 만든 몸돌과 이수부는 중국풍으로 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거북받침돌은 투박하고 조각수법이 세려되지 못한편이다.


지금은 놀이공원 '롯데월드'가 들어서 있는 석촌호수는 원래 한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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