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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 유적_왕릉

김포 장릉,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 능

younghwan 2013. 2. 1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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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시 도심 뒷편 장릉산 자락에 위치한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 구씨의 능이다.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인원왕후의 무덤 또한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것으로 원종의 무덤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며, 조선후기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장릉은 약간 경사진 언덕에 홍살문, 정자각, 봉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 오른편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김포평야에 위치한 높지 않은 장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가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까닭에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능역이 넓고 깨끗하게 조성되어 있는 편이다. 왕릉 앞쪽에는 넓은 연못과 재실을 두고 있으며, 원찰로 금정사를 두고 있다.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은 선조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때에는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을 동행했으며, 임란후에는 선조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왕자시절에는 정원군으로 불리웠으며, 광해군때에는 집권세력에 밀려났던 서인들과 많이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광해군의 견제를 많이 받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사저는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로 광해군에 의해 쫓겨나고 서궁이라 불렸던 경희궁이 세워지기도 했가, 셋째 아들 능창군은 무고로 강화도로 유배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실제로 활달하여 당시 서인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아들인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추존왕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광해군이 실권하고 인조가 집권한 것으로 볼 때 광해군의 견제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에 대한 인물평은 그로 좋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후손이 조선후기 왕위를 이어왔고 서인이 집권세력을 유지했기때문 후대에 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거의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김포 장릉, 사적 202호
조선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정원군으로 책봉되었으며(1587), 광해군 11년(1619)에 40세로 돌아가셨다. 그의 맏아들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1623),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인조 10년(1632)에 대왕으로 추존되었고, 원종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인원왕후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3세에 혼인하여(1590) 연주군부인에 봉하여지고, 인조4년(1626)에 49세로 돌아가셨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부부인에 봉해지고, 원종과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자리한 쌍릉을 이루고 있으며 문무석과 호석을 세웠는데 난간은 없다. <출처:문화재청>


김포시 장릉산 자락에 위치한 추존왕 원종의 능인 장릉. 원종은 선조의 5번째 아들로 인조가 반정에 성공에 왕위에 올라 왕으로 추존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큰 규모의 독립된 능역에 왕릉을 웅장하게 조성해 놓고 있다. 지금은 승가대학이 있는 금정사를 원찰로 두고 있을 정도로 크게 조성한 왕릉이라 할 수 있다.


장릉 입구. 장릉은 김포시청에서 도로를 따라서 언덕을 넘으면 바로 찾아갈 수 있다.


장릉으로 들어가는 숲길


장릉 아래쪽에 위치한 재실


재실에서 장릉으로 들어가는 길.


장릉 아래에는 큰 규모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천방지원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 사각형은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연못 주위에 조성된 산책로


왕릉 입구의 홍살문


홍살문 앞에는 작은 개울은 금천과 돌다리인 금천교가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박석을 깔아 놓은 참도


왕릉에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 기단 높게 쌓지는 않고 있다.


정자각 계단


정자각 월대


월대에서 내려다 본 참도.


정자각 내부. 다른 왕릉에 비해서 봉분이 낮게 조성되어 있어 정자각에서 봉분이 보인다.


수복방


비석이 모셔진 비각


육경원 비석 받침돌


봉문이 나란히 있는 쌍릉의 형태를 하고 있다.


장릉 봉분.

장릉 재실
조선왕릉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인 영(종5품)과 참봉(종9품)의 거처이며 제례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러 제계하고 제수를 미리 마련하여 갖추어 두는 곳으로 왕릉의례를 위한 준비공간이며 임금이 내려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다. 장릉 재실은 정면 5칸, 측면 2칸 10칸 규모이며,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은 정면과 좌측면이 장대석 2벌대 쌓기를 했고 배면과 우측면은 1벌대로 지형에 맞춰 기단을 쌓았다. 재실 평면은 방 2칸, 대청 2칸, 외대청 1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방 2칸은 대청 좌.우측에 1칸씩 배치되어 있고, 온돌방 구조이다. <출처:문화재청>


장릉 재실. 재실은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근무하는 장소이자,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실 건물을 중심으로 여러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재실 마당


재실은 앞면 5칸, 옆면 2칸에 화강석으로 쌓은 축대위에 세워져 있다. 관리들이 근무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왕을 비롯해 제사를 준비하는 인사들이 잠시 머무는 공간으로 평상시에는 실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릉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실제 기거했던 공간인 행랑채


재실 오른편에 있는 행랑채 건물


조선후기 서궐이라고 불렸던 경희궁. 원래 이곳은 원종이 살았던 사저가 있었던 곳으로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광해군이 이곳에 궁궐을 조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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