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남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사적 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던 곳이다. 진주성은 백제가 쌓은 거열성이 있었던 곳으로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공민왕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석축성을 쌓았다고 한다. 진주성은 서울의 풍납토성, 행주산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등과 마찬가지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나지막한 동산에 위치하고 전형적인 백제 읍성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성곽이다. 지금은 둘레 1.7km 규모의 외성만 남아 있지만 동쪽으로 외성이 있어 전체 규모는 둘레 4km 정도의 읍성이었다고 한다. 진주성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하천이 흘러서 해자 역할을 했으며, 전체적으로 동쪽을 제외하고는 섬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 천연의 요새라 할 수 있는 곳이다.
백제가 쌓은 토성이었던 진주성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고려말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석축성을 쌓았으며, 선조대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경상감사가 진주성을 보강하고 외성을 쌓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왜군을 물리친 진주대첩이 있었고, 이듬해 정유재란시 왜군의 대공세로 함락되기도 하였다. 원래 경상도 서쪽지역 방어를 담당했던 경상우병영은 마산 합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시 왜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쉽게 함락되자 그 위치를 진주성으로 옮기고 방어시설을 크게 보강하여 오늘의 진주성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진주는 원래 목사가 고을 수령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상우병영이 옮겨옴에 따라 병마절도사(종2품 무관)가 목사를 겸임하였다가 폐해가 많아 경상우병영과 진주목이 분리 운영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진주성은 다른지역 읍성과는 달리 관아가 있던 읍치가 아니라 오로지 군사적인 목적의 방어시설로 군사들이 주둔하는 병영이었고 진주목 관아는 진주성 북쪽 바깥에 별도로 있었다고 한다.
진주성, 사적118호,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 말 우왕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25년(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천8백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간인과 관료, 군인 등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절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에는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왜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200ㅇ2년에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출처: 진주시청>
남강을 건너는 진주교 다리 위에서 본 진주성 동문인 촉석문과 촉서루 주변 전경. 동문인 촉석문은 원래 내성 성문으로 외성의 규모가 4 km정도로 크고 동쪽편이 방어에 취약한 면이 있어 경사진 언덕을 이루고 있는 지형에 내성을 쌓고 요새와 같은 형태로 축성하였다. 현재의 진주성은 임진왜란 이후 경상우병영이 옮겨오면서 호남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군사적인 목적의 방어시설로 쌓은 성곽이다.
진주성 모형(출처:국립진주박물관). 현재의 진주성 동쪽으로 강변을 따라서 외성이 있고 북쪽에도 개천이 흘러 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진주성에는 병영이 설치되고 관아가 있는 진주성 읍치는 성 바깥쪽 북쪽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강변을 따라서 진주성 동문인 촉석문으로 들어가는 길. 강변을 따라서 원래 외성이 있었고 그 안쪽에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다.
진주성 동문인 촉석문. 경상우병영이 있던 진주성 내성 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복원하였다. 진주성에는 동문인 촉석문과 북문인 공북문, 서쪽에 작은 암문 형태의 성문을 두고 있다.
촉석문 주변 성벽. 진주성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사진 언덕에 석축성 형태로 성벽을 쌓고 있는데, 다른 지역 읍성에 비해서 성벽이 높고 조총의 공격에 대비한 여장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다.
성벽은 잘 다듬한 큰 화강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쌓고 있으며, 그 높이도 10 m 이상으로 꽤 높은 편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왜군의 공격을 비교적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곳이어서 다른 지역의 읍성에 비해서 튼튼하게 쌓았다.
진주성 내성 동쪽편 성벽.
성벽은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경사진 언덕에는 낮게, 그렇지 않은 곳에는 높게 성벽을 쌓고 있다.
자연석을 다듬어서 쌓은 다른 지역 읍성과는 달리 화강석을 다듬어서 견고하게 쌓은 진주성은 조선후기 성벽 축성방식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촉석문 성문.
촉석문 현판
촉석문 출입문 천장. 동쪽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내부에서 본 진주성 촉석문
진주성은 경사진 지형에 바깥쪽에는 석축을 쌓고 안쪽에는 토축을 쌓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축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진주성은 원래 백제가 쌓은 토성이 있었기때문에 성벽 바깥쪽에 석축을 쌓아 보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주성 동쪽편 성벽 안쪽에는 지금은 넓은 광장으로 바뀌어 있는데, 조선후기 경상우병영에 소속된 관아 건물이나 병사들이 머무는 공간, 창고 등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장이 설치된 동북쪽 성벽
촉석문 문루
성벽 여장 안쪽은 흙을 쌓을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형조건을 하고 있다.
진주성 동북성 성벽 안쪽. 진주성은 대체로 70년대에 복원되었기때문에 원래 성벽 형태로 복원되지 않고 콘크리트로 길을 만드는 등 변형된 부분이 많아 보인다.
진주성 동북쪽 성벽 안쪽
촉석루에서 의암바위가 있는 곳으로 나가는 출입문. 원래 이곳에 암문이 있었는 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을 통해서 성바깥으로 나가볼 수 있다.
촉석루 아래에 있는 작은 출입문
축석루와 바깥쪽 성벽
진주성 남쪽은 절벽을 이루고 있는 자연지형 덕분에 낮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설치해 놓고 있다.
논개가 왜장을 안고 물에 빠졌다는 의암바위로 내려오는 길
의암바위 주변 남강변 절벽
진주성 전경. 남강변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평지보다는 높지만, 평편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요새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가 읍치나 군사를 주둔하기 위한 요새로 선호한 지형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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