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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박물관] 임진왜란에 활약한 의병

younghwan 2013. 8. 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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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은 국가에 큰 난이 생겼을때 국강의 명령이나 징발에 의하지 않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군대를 모집하여 참전했던 오늘날 민병대에 해당하는 군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은 삼국시대 호족을 중심으로 한 부대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이끈 독립군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의병의 활동과 역할이 가장 컸고 그 성과도 뛰어났던 시기가 임진왜란 7년동안의 전쟁기간이었을 것이다. 의병은 관군을 궤멸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했던 당시 전쟁에서 왜군의 배후에서 소규모집단이 게릴라전을 통해 적을 혼란시키면서 왜군의 기세를 꺾고 후방을 교란시키면서 관군이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은 전국각처에서 일어났는데 그 신분은 전직관료, 유생을 중심으로 농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특히 승려들로 구성된 의승군은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 불교가 다시 중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국의 큰 사찰들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지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의병은 경남 의령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켰는데 소규모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을 괴롭혔으며, 이순신의 수군과 함께 왜군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진주박물관에는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다수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 영천전투를 비롯하여 경상북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통해 큰 공을 세웠지만 후대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응수 유품을 비롯하여, 함경도지역에서 큰 역할을 했던 정문부, 호남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금산에서 전사한 고경명,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2차 진주성싸움에서 전사한 김천일, 황해도에서 활동한 이정암 등의 유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임진왜란 의병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규군이 붕괴되자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외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뭉쳐 일어났던 것이 의병이다. 의병은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적게는 몇십명에서 많게는 몇천명까지 적극 호응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재산을 사용하여 물자를 조달했으며, 부대마다 지켜야 할 군율을 정하고 일본군을 무찌를 것을 맹세했다. 또한 대장 아래 군사의 훈련, 물자의 조달, 전략 수립 등을 담당한 참모들을 두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전국에 걸쳐 일어났던 의병은 일본군을 기습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여 그들의 진격을 막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 의병동의 원천은 무기나 병력 등의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충성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결사 항쟁의 정신에 있었다. <출처:진주박물관>


권응수 영정, 복제품, 보물668호, 임진왜란 후 1604년(선조37)에 권응수가 선무공신에 책록되었을 때 공신도감에서 그려 하사한 영정이다. 두 손을 모으고 의자에 앉은 전신교의좌상이며, 족좌를 갖추고 있다. 흉배에 무신을 상징하는 호랑애 모양이 그려져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권응수 각대, 보물668호, 권응수의 유품이다. 임금에게서 받은 하사품이며, 집안에서 전해 오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권응수 유품 벼루와 장검(1521년), 장검은 권응수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군으로부터 노획한 칼로서, '대영원년(1521)'이라는 일본 연호가 새겨져 있다.


영양창의록, 1822년, 경상북도 영천 지방에서 일어난 네 차례의 의거에 대한 공적을 기록한 책으로 내용은 <임진록>, <정묘록>, <병자록>, <무신록> 등의 제목을 달아 서술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세아의 의거,정묘호란 때 손해의 의거, 병자호란 때 정호인의 의거,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무신란 때 정규양의 의거 등에 관한 공적을 적었다. 영천성은 임진왜란 때 권응수의 활약으로 탈환한 곳이기도 하다. <출처:진주박물관>


창의토왜도, 1592년 일본군이 함경도에 쳐들어 왔을 때 의병을 일으켰던 정문부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다. 정문부의 '북관대첩'을 그린 것으로 '북관유적도첩'에 실려 있다. 당시 국경인.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에 부역하였는데 피난 중이던 두 왕자 임해군.순화군을 붙잡아 일본군에 넘기는 등 경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에 정문부를 비롯하여 이봉수.최배천.지달원.강문우.정현룡.오응태 등이 군사를 일으켜 경성을 수복하고 국세필을 잡아 목을 베었다. 대장기가 꽂힌 성루에 정문부가 앉아 있고 그 앞에 적도들의 목을 베고 있으며 성 밖에서 적을 추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농포집,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정문부(1565~1624)의 시문집이다. 이 가운데 '장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경성에 들어가 백성을 안정시키고 일본 장수를 참수한 뒤 반란자 국경인 등을 사로잡은 경로와 상황을 서면으로 자세하게 보고한 것이다. 또한 '격문'은 함경도의 여러 수령과 선비들에게 국가의 위급함을 호소하여 의병에 가담하여 줄 것을 권유한 글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연성대첩비 탁본, 임진왜란 때 황해도의 연안성 전투에서 초토사 이정암이 일본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군대와 맞서 대승을 거둔것을 기념하는 비석을 탁본 한 것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사류재집, 이정암, 복제품, 연안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정암의 시문집으로서 연성대첩비문이 실려 있다. 이 문집 중 '십조차'는 군사제도를 보완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고, 붕당을 없애 조정을 화평하게 하는 것, 언로를 열어 백성들의 의견을 두루 살필 것 등 모두 10개 조항에 걸쳐 당시의 제반 사정을 두루 진언하였다. 또한 저자의 일대기, 왜장에 대한 답서, 의병모집 격문, 역대 일본 침략기 등도 함께 실려 있어 국제정세와 임진왜란 전후사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출처:진주박물관>


호남절의록, 1799년,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활약한 호남지방 의병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1799년 의병장 고경명의 7세손 고정헌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특히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순절한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다. 호남창의동사록. 호남 지방에서 봉기하여 생사를 같이 할 것을 결의한 의병들의 명단과 행적을 간략하게 엮은 책이다. <출처:진주박물관>


고경명 글씨, 16세기, 복제품. 고경명이 쓴 글로 세독충정이란 '세세토록 독실히 충성을 다 한다'라는 뜻으로 나라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김천일 유물, 복제품,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으로 본관은 언양, 호는 건재이다. 이항의 문인으로 1573년(선조6)에 학행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경명 등에게 글을 보내어 창의기병할 것을 제의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박진영(1569~1641) 유품. 갓끈, 옥로, 관자. 함안의 선비로서 임진왜란 때 군수 유숭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의병장 곽재우, 초유사 김성일 등과 함께 활약하였으며 7년 전쟁동안 많은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이괄의 난'에서도 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며 1871년(고종8)에 '무숙'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광서선생실기 목판, 박진영의 생전에 지었던 시문, 간찰 등과 제문, 행장 등을 엮은 책이다. 박진영의 7세손 치복이 편찬하였다. 이 목판은 책을 인쇄할 때 사용한 것이다.


흉배, 무관의 가슴과 등에 붙이는 것으로 호랑이 문양이다.


사명대사 영정, 복제품, 선조때의 고승으로 속성은 임, 호는 송운 또는 사명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군을 모집하여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서산대사가 물러난 뒤에는 승군을 통솔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울산과 순천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선조 37년(1604)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포로가 되었던 3,500여 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출처: 진주박물관>


포로송환문서, 임진왜란 전후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전쟁포로를 송환한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이다.


흥국사 심검당 상량문, 1633년, 복제품. 임진왜란 때 흥국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승군은 전라좌수영 관할 아래 있으면서, 지역 경계 근무, 조선, 전함 수리, 군사작전 수행, 제지, 위령제를 맡았다. 그 이후로도 흥국사에는 계속 의승군이 주둔하였는데, 이들의 편성 및 운영활동상황을 알려주는 문건은 1633년에 작성된 이 문서 이외에도 서너 건이 더 있다. 의승군의 규모는 많을 때는 700여 명에 달하며 대체로 300여 명 정도였다. <출처: 진주박물관>

진주성과 임진왜란
1592년 8월에 이르자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배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진주를 점령하여 저항운동의 본거지를 소탕하고 전라도 공격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1592년 8월 서울을 출발한 일본군 2만명은 김해를 거쳐 9월 말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일본군이 몰려오자 3천8백여명의 병력과 진주성 내의 백성을 규합하여 결전태세를 갖추었고, 성밖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의병이 합세하여 일본군을 견제하였다. 일본군은 엿새 동안 공격하였으나 결사적인 대항에 공략을 포기하고 10월10일 퇴각함으로써 조선은 진주성 방어에 성공하였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일본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좌절시킨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이 패배를 설욕하고 강화교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9만의 일본군이 1593년6월19일 다시 한 번 진주성을 공겨하였다. 이때 진주성 안에는 김천일을 비롯한 최경회.황진.고종후 등의 지휘부와 3천5백여 명의 병사, 6~7만명의 백성이 있었지만 철저히 무장된 일본군과 싸워 진주성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완전히 고립된 채 연일 계속되는 공세를 잘 막았으나 열흘째인 29일 일본군은 무너진 성벽으로 난입하였다. 이때 진주성 내 함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맨손으로 끝까지 항전하다가 김천일.최경회 등의 지휘부를 필두로 7만여 명이 순절하였다. 진주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 공방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어서 결국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던 것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진주성모형. 내성은 현재 정비되었으나 외성부분은 진주시가지로 변했고 해자지는 일제에 의해 매립 또는 복개되어 그 자최를 찾을 수가 없다. <여지도서> <경상도우병영> 조에는 '촉석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안에는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수품 창고가 있다.


진주성도 병풍, 복제품, 내성과 옹성으로 되어 있는 조선시대 진주성과 시가지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내성은 현재 정비.복원되어 있으나 외성부분은 현재의 진주 시가지로 변했고 연꽃이 그려져 있는 해자는 매립.복개되어 그 자취를 감추었다. 성 안에 현존하는 건물을 촉석루를 비로하여 영남토장사무, 서장대, 북장대, 촉석문 등이 있다. 성 밖에 현존하는 건물로 진주향교가 보인다. <출처:진주박물관>


김시민 선무공신교서, 보물 1476호, 1604년, 복제품, 공신교서는 왕이 공적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리는 공문서이다. 이 교서는 진주대첩을 지휘한 김시민에게 내리는 선무공신 2등교서이다. 일제시대에 유출되었으나 2006년 문화재 환수를 염원하는 국민의 성금에 의해 국립진주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출처: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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