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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내에 위치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남지역 선사시대와 가야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1984년에 개관한 박물관으로 1998년에 가야유물을 전시.연구하는 김해박물관이 개관됨에 따라서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상설전시실은 임진왜란실과 역사.문화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실은 임진왜란의 시작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일부 유물들은 복제품을 전시해 놓고 있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기간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로 역사박물관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은 1592년 고니시가 이끄는 2만명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정발장군이 이끄는 부산진성은 관민이 합심하여 방어했지만 2시간만에 함락당하고 이어 다대포성에 함락되어 첨사 윤홍신은 전사하였고, 다음날 동래부사 송상헌이 이끄는 동래성 또한 함락되었다. 왜군은 동래성을 함락하면서 민간인들을 처참하게 살육했는데, 이는 초전에 왜군의 잔혹함을 보여줌으로서 다른 지역에서 왜군에 대항하고자 하는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후 왜군은 충주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 정예군을 만나기 전까지는 큰 저항이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동래에 같이 있었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지원군모집을 구실로 성을 나갔고 상당수 고을 수령들은 왜군을 피해서 도망갔었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동래성전투가 있었던 동래읍성 남문이었던 수안동에서 출토된 당시 무기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경과를 기록한 류성룡의 징비록, 정탁의 임진기록, 의병장 정경달의 반곡진법을 비롯하여 당시 전쟁을 독려하는 선조의 교지, 전령을 비롯한 다양한 문서들, 개인간에 오갔던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유물로 선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작성된 교지를 볼 수 있는데, 이미 조선중기에 한글은 민중에 깊게 뿌리내려 생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전투의 시작
1592년 4월 14일 새벽 일본군의 부산진성 공격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일년여의 전쟁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대마도를 출발하여 전날 오후 5시경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있었다. 일본군의 내습은 경상좌우도의 봉수를 통해 각지에 전해졌고, 부산진첨사 정발은 절영도에서 급히 귀한하여 방어준지를 했으나 전쟁경험이 풍부하고 조총과 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1번대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 2만여 명 앞에서는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새벽 3시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약 두시간 만에 성을 함락시켰고 정발은 전사하였다. 이날 일본군은 다대포에 부대의 일부를 보내 점령하니 다대포첨사 윤홍신이 전사하였다. 다음날인 15일 6시부터 일본군은 동래성을 포위하고 공략했는데 경상좌병사 이각은 지원군 모집을 구실로 성을 나갔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중심이 되어 결사항전 하였다. 일본군은 나무판자에 '싸우던지 싸우지 않고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고 하였다. 성중의 백성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항전하였으며 부녀자들까지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했다. 성이 함락되자 송상현은 '달무리에 싸이듯 외로운 섬 큰 진에서는 구원하지 않는구나. 임금 신하 사이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간의 은혜는 가볍도다.'라고 하면서 순절하였다. 포르투갈 신부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에는 '조선인들이 매우 용감하게 싸웠으며, 일본군은 성을 함락시킨 후 심지어 가축까지도 무차별 살육하였다.'고 하였다. 길고 험난한 7년전쟁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출처:진주박물관>


동래부순절도, 조선후기 화가 변박이 임진왜란 발발 후 두번째 싸움인 동래부 전투를 그린 기록화이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민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결의하였다. 일본군이 패목을 세워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써서 성 밖에 세웠다. 이에 송상현도 또한 목판에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고 써 싸울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전투 끝에 동래성은 함락되고 송상현은 전사하였다. 부산진순절도(복제품, 1780년), 조선후기 화가 변박이 그린 기록화로서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진전투이다.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일본군이 부산에 침입하였다. 다음날 아침 6시경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때 부산진첨사 정발이 군민을 지휘하여 분전하였으나 성은 함락되고 정발은 순절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동래읍성발굴과 출토유물
동래구 복천동 일대에 위치한 동래읍성은 일본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국방과 외교통상에 있어 중요한 곳 이었다. 읍성은 고려 말 우왕13년(1387) 축성된 후 세종대에 한 차례 개축되었고 임진왜란 발발 후 두번째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최근 읍성의 남문 부근에 해당하는 수안동 로터리의 부산 지하철 3호선 건설에 따른 유적발굴에서 잘 보존된 해자와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을 확인할 수 있는 갑옷.환도.창 등의 무기류, 전투로 입은 상흔이 있는 두개골 등이 다량 발굴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부산 수안성 출토 유물, 투구.환도.


화살촉.깍지

임진왜란의 원인
16세기 중엽, 백여년의 세고쿠시대를 끝내고 일본의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토지제도 정비와 영주들의 재배치, 광산 개발 등을 통해 권력을 굳혔다. 일본을 넘어서 외국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철저한 준비 끝에 조선을 침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영웅심과 정복욕, 둘째.조선과 명에 대한 조공무역의 재개. 셋째.일본 내 강성한 봉건영주 세력의 해외원정으로 인한 세력 약화 기도. 넷째. 해외 획득 영토의 분배를 통한 측근 봉건영주의 논공행상.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는 당시 일본 사정에 어두워 여러가지 침략 조짐이 감지되었으나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징비록, 류성룡, 17세기.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저술한 수기이다. 임진왜란 7년간의 전쟁 기사로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징비'는 <시경>, '소비편'에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정원전교, 1592년, 선조, 복제품. 1592년 12월 14일 류성룡이 임진왜란 중 승정원을 통해 받은 왕의 지시가 담긴 문서이다. 평양 부근에서 도제찰사의 임무를 수행하던 류성룡에게 내린 것으로서 명군을 지원하라는 선조의 유지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임진기록, 정탁, 1592~1598년, 복제품. 임진왜란 7년가느이 기사가 주를 이루며, 전후의 일을 기술한 부분도 더러 있다. 내용을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조선국내의 전쟁관계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명과 관계된 기록이다. 그런데 왜란중의 기록에서도 갑오년(1594)의 사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출처:진주박물관>


반곡진법, 정경달, 17세기, 임진왜란 중 의병활동을 한 정경달의 친필 병서이다. 그림과 함께 의병활동상을 적었다.


김성일 한글편지, 보물 905호, 1592년, 복제품, 선조 25년(1592) 12월 24일, 김성일이 경상우병사로 경남 산음현(지금의 산청) 진중에서 안동 본가에 있던 부인 권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전쟁 중 가족과 부인에 대한 걱정과 정이 담겨 있다. 당시의 국어연구에 필요한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진주박물관>


선조국문교서, 보물 951호, 1593년, 복제품, 임진왜란 당시 피난 가 있던 선조가 1593년 9월에 내린 한글 교서이다. 당시 조선은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지원 등으로 평양 경성 등 실지를 회복하였고, 왜군은 남하하여 부산.동래 등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포로가 되어 왜군에 협조하던 백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선조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읽기 쉬운 한글로 교서를 내린 것이다. 당시 김해수성장 권탁은 이 문서를 지니고 적진에 잠입, 왜군 수십명을 죽이고 백성 100여명을 구출해 나왔다. 이 문서는 형식상 교서라기보다 유서라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이르사되 너희가 처음에 왜에게 주리어(잡히어서) 연하여 다니는 것은 너의 본 마음이 아니라, 나오다가 왜에게 들키어(발각되어) 죽을까도 여기며 도리어 의심하되 왜에게 편들었던 것이니, 나라에서 죽일까도 두려워 나오지 아니하니 이제는 너희 그런 의심을 먹지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면 너희를 각별히 죄 주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그 중에 왜를 잠아서 나오거나 왜가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 나오거거너 추리인(잡힌) 사람을 많이 더붙어 나오거나, 이러한 공이 있으면 양천은 물론이고 벼슬도 줄것이니 너희는 조금도 전에 먹은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오나라. 이 뜻을 각처의 장수에게 다 알렸으니 감히 의심 말고 모두 나오라. 너희 중에 설마 다 어버이와 처자가 없는 사람 있겠는가? 너희 살던 곳에 돌아와 옛날대로 도로 살면 후련하지 않겠는가? 이제 곧 아니 나오면 왜에게 죽을 것이고 나라가 평정된 뒤에 너희들인들 아니 뉘우치겠는가? 하물며 당병(명나라 군사)이 황해도와 평안도에 가득하였고, 경상 전라도에 가득히 있어 왜가 곧 빨리 제 땅에 아니 건너가면 이 즈음에 합명하여 부산 동래에 있는 왜들을 다 칠 뿐 아니라, 강남(명나라) 배와 우리나라 배를 합하여 바로 왜 나라에 들어가 다 분탕할 것이니 그 때이면 너희들조차 휩쓸려 죽을 것이니, 너희가 서로 멀리 그 전에 쉬이 나오라" <출처:진주박물관>


전령, 1592년, 복제품. 전령은 어떤 관청에서 관할하고 있는 관리나 백성에게 내린 공문의 한 종류이다. 이 전령은 1592년 7월13일 경상도의 초유사인 김성일이 영산(경남 창녕)에서 왜적을 죽이고 그 귀를 보낸 우치홍에게 영산현의 의병부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임명장이다. 임진왜란 초기 영남지역의 의병활동과 국가의 의병활동 지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 <출처:진주박물관>


히젠나고야성제후진적도, 복제품. 히젠나고야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1년 전에 쌓았다. 도요토미의 진영을 중심으로 각 다이묘의 진영을 점으로 표시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마에다 요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등 이름 있는 다이묘들이 정치적 관계에 따라 배치되었음을 보여준다. <출처:진주박물관>


박진 위성공신교지, 복제품. 선조 25년(1592)에 함경도로 피난한 세자 광해군을 호종한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린 공신 책록 교서이다. 이 교서는 위성공신으로 책록된 82명 가운데 3등에 봉해진 박진에게 내린 것으로 본인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 품계를 한 등급 높여 주고 대대로 세습하여 노비와 토지, 은, 말 등을 하사한다는 포상 내용이 적혀 있다. <출처:진주박물관>


항병일기, 김해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부터 다음해 경주에서 전사하기까지 기록해 놓은 것이다. 특히 안동의 전투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의 전략과 점령정책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초기 전략은 단기간에 조선 전역을 장악하고 이곳으로부터 군수물자를 공급받아 명나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조선의 통치체제도 자신들과 같이 봉건체제여서 전국팔도가 각각 다른 나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 통치자만 항복하면 통치하는 영역은 자신들의 판도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일본군은 빠르게 북상하여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피난으로 항복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일본군 장수들은 1592년 5월 초 서울에 모서 조선 각도를 분담하여 점령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입국에 대비하여 부산에서 서울에 이르는 도로의 정비와 숙소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나 1592년 7월을 기점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관군들이 정비되면서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특히 조선수군의 연전연승으로 일본군은 서해안을 통한 물자의 수급이나 지원을 할 수 없었고, 명군의 참전으로 더 이상 북진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초기전략을 수정하여 중국으로의 진격을 포기하고 조선 일부만이라도 점령하기 위해 강화협상을 벌였다. 한편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자들을 관리로 임명하고 공고문을 내걸어 자신들에게 협력하고 원래 거주지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저항이 심해지자 정유재란 때에는 회유책을 포기하고 반항하는 이는 철저히 응징하는 것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출처:진주박물관>


회본태합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글과 그림으로 엮은 책으로 임진왜란의 주요 장면이 그림과 글로 쓰여 있다. 태합이란 도요토미의 벼슬이름이다. <출처:진주박물관>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 복제품, 도요토미 사후 2년째인 경장5년(1600)에 그려졌다. 인물 위쪽으로는 동복사 소코 이쿄오는 '모든 장수가 추앙하는 것이 태산과 같다.'라는 찬문을 적어 놓았다. <출처:진주박물관>


명황책봉문, 1593, 복제품,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4월,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하면서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교섭이 본격화되었다. 교섭을 맡았던 심유경은 일본 측이 제시한 강화 조건을 명에 전달하지 않은 채, 명 황제로부터 책봉문을 받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토미에게 바쳤다. 도요토미는 '그대를 봉하여 일본 국왕으로 삼는다'라는 교섭의 기만성에 격노하였다. 후일 이 사건은 정유재란의 발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주인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베시마 니오시께에게 준 명령서이다. 여기에는 명나라로 가는 도로와 자신이 머무를 거처를 마련하라는 명령으로 1592년 6월3일에 작성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정유재란 침략군대 분담문서, 1597년, 복제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출병명령서로 각 부대의 동원할 군사의 규모를 명시하고 있다. 정유재란 개전명령서와 함께 내린 것으로 1592년 2월 21일에 작성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


정유재란 개전명령서, 1597년, 복제품, 일본의 조선 출병 장군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출정명령서 군령장이다. 내용 가운데 이일 교대로 참전하고 또 명군이 출명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신도 조선에 건너가 토벌한다는 결의가 있다. 1597년 2월21일에 작성되었다. <출처:진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