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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 몽촌토성 발굴.조사 과정

younghwan 2014. 3. 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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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공원은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건설한 공원이다. 옛 한성백제 왕성이었던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경륜장, 역도경기장, 체조경기장 등 체육시설과 한성백제박물관, 올림픽회관등 공공시설들이 들어서 있고, 43만평의 넓은 부지 위에 넓은 잔듸밭,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다. 서울의 한성백제 유적은 왕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고분지역인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등이 남아 있는데, 1970년대 강남지역개발로 많은 지역들이 아파트, 도로 등 도시기반시설을 건설하는 동안 묻혔다. 석촌동고분군의 경우 유적지지하로 도로가 관통하고 있으며, 풍납토성에는 아파트를 비롯해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인구 4만명이 사는 주거지로 바뀌어 토성 성벽만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으로 지정되어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으나, 이 또한 공원산책로 역할을 하고 있다.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부지로 결정된 이후 1983부터 6여년간의 발굴조사 과정을 거쳤다. 6년은 긴시간처럼 보이지만 넓은 지역을 발굴.조사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할 수 있다. 몽촌토성 발굴.조사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주도적으로 실시하였으며, 한양대.단국대.숭전대 등도 참여하였다. 초기 발굴조사 과정에서 토성 외곽 목책과 해자시설을 확인하였고, 생활유구와 매장유구 조사를 통해 곧은입항아리 세발토기, 굽다맂버시 등 백제토기와 동전무늬도기 같은 토성의 축조시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들도 출토되었다. 1988년 토성 동남쪽 지역에 대한 조사.발굴과정에서 고구려토기가 출토되어 한성백제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군이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한성백제기 유물들로 중국에서 수입된 도기 등이 많이 출토되는 등 중국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다. 이는 한성백제기에 백제가 한.중.일 무역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던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꿈마을 사람들, 오늘
1981년 독일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시는 잠실동과 방이동 일대에 올림피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을 만들게 되었다. 475년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어 역사무대에서 퇴장했던 백제의 왕성(몽촌토성)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세계인의 꿈이 만나는 올림픽을 통해 꿈의 무대로 돌아오는 길목이었다. 1984년 올림픽경기장 건설과 올림픽공원 조성이 동시에 추진되면서 몽촌토성 발굴조사와 정비공사가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1983년 간단한 시굴조사부터 따지면 1986년 한해를 거르고 1989년까지 6년동안 서울대학교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발굴 3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특별전시

서울올림픽유치와 올림픽공원 조성
1979년에 처음 계획된 서울올림픽은 1980년부터 본격 추진되었다. 이미 일본 나고야시가 올림픽 유치활동에 적극 나선 상태였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수도 서울이 가진 인프라의 우수성과 분단국가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이 가져다 줄 상징적인 의미를 적극 선전하였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총회에서 서울은 80명의 IOC위원 중 52명의 찬성표를 얻어 27표를 얻은 나고야를 상대로 압도적인 표차로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뒤, 올림픽경기장 부지는 잠실종합운동장과 강동구 둔촌동(지금의 송파구 방이동)의 올림픽공원 그리고 기타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올림픽공원은 기본설계로 사이클, 펜싱, 체조, 역도, 테니스, 수영 등의 경기장이 확정되었고 공원에는 몽촌토성 산책로, 인공호수, 녹지대, 야외공연장 등을 건설하기로 결정되었다. 1984년 4월 올림픽공원 조성공사를 시작해 1986년 4월에 완공하였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몽촌토성 발굴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1985년 발굴조사 중간보고 궤도, 1984.1985년도 몽촌토성 유구배치도

6년간의 발굴기록
1983년,
몽촌토성에 대한 최초의 발굴조사는 1983년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수행하였다. 1983년도 조사는 토성 보존을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성의 규모와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 주요목적이었다. 조사결과 몽촌토성은 전체적으로 마름모 형태이고 성벽의 둘레는 대략 2,300m이며, 동북벽에서 성의 동북쪽으로 약 270m 가량 뻗어나간 외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잔존하는 성벽의 높이는 10m 이상이고, 성벽 상단부의 폭 또한 7m 이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당시에는 성벽의 바깥쪽에 대한 시굴조사도 이루어져, 몽촌토성의 외곽에 목책과 해자시설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밖에도 합구식 독무덤도 2기가 조사된 바 있다.
1984년도 조사는 서울대학교, 한양대학교, 숭전대학교, 단국대학교로 구성된 몽촌토성 발굴조사단이 약 3개월간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토성은 원래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되, 낮은 부분은 흙을 교대로 쌓아 올리는 성토방식, 높은 부분은 일부를 깎아 내어 급경사면과 단을 이루도록 하는 성벽 축조 방식이 적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경사면에는 목책을 설치하고 급경사와 단 시설은 성벽 정상부에서 바닥까지 2~3회 반복되다가 해자로 연결되게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성의 각 모서리 정상부에는 주위보다 3~5m 가량 높은 토단을 만들어 성벽 외부에 대한 조망이 가능하게 한 것도 확인되었다.
1985년에는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6개월에 걸쳐 성 내부에 대한 전반적인 유구분포 조사와 3개 문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많은 수의 생활유구와 매장유구가 조사되었으며, 곧은입항아리, 세발토기,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등의 백제토기와 함께 몽촌토성의 축조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금동제 허리띠장식, 동전무늬도기 같은 중요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1983~85년 주요 발굴 성과 사진


1983년도 몽촌토성 약보고서, 1985년 몽촌토성 보고서 원고, 서울대학교


몽촌토성 발굴조사 앨범, 한양대학교박물관


몽촌토성 발굴조사 사진(숭전대학교), 서울대학교박물관


몽촌토성 발굴사진 필름, 단국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단 휘장, 단국대학교 박물관


몽촌토성 발굴조사일지, 단국대학교 박물관

1987년부터는 기존의 조사 성과늘 바탕으로 3년에 걸쳐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토성내부를 전면 발굴조사하였다. 우선 1987년도에는 몽촌토성의 동북지구를 조사하여 수혈주거지 5기 및 저장구덩이 9기, 독무덤 1기, 적석토광묘 1기 등 모두 16기의 유구와 집중 유물 산포지를 확인하였다. 1호 주거지에서 15m 가량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서는 10x10m 정도의 범위에 많은 양의 토기가 산포된 채로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굽다리접시, 뚜껑, 계란모양토기 등과 함께 연꽃무늬 수막새와 중국 육조시대 청자벼루가 출토되었다.
1988년에는 몽촌토성의 동남지구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주거지 4기, 저장구덩이 7기, 돌무지 유구 3기, 생활면 유구 1기, 방형 구덩이 유구 1기 등이 발견되었다. 한편, 1988년도 조사에서는 고지대의 방형 유구에서 네귀달린항아리와 함께 다량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어, 고구려 군대가 한성을 점령한 뒤 백제의 도성이었던 몽촌토성에 한동안 주둔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1989년에는 몽촌토성 서남지구를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지상건물지와 온돌건물지, 저장구덩이, 연못, 판축대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 기와, 수막새, 중국자기, 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89년도 조사에서는 연못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연못은 두 지점에서 확인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고지대에 위치한 것으로 깊은 곳은 2.5m 이상이며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다. 다른 하나는 남문 근처 저지대였는데, 내부에서 백제토기와 함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어 몽촌토성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된 흔적이 파악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1987~1989년까지 주요 발굴 성과




몽촌토성 발굴조사 앨범, 서울대학교 박물관


몽촌토성 발굴야장, 서울대학교 박물관


몽촌토성 발굴조사일지


1985년도 몽촌토성 중간보고서 원본


몽촌토성 발굴조사 보고서, 서울대학교 박물관

올림픽공원에서 백제왕도로,

1980년대 발굴의 남은 과제
1983~1989년의 몽촌토성 발굴조사는 백제 한성기 왕도의 실체를 밝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유적의 규모와 중요도에 비해 조사기간이 너무 짧았고 성안 평탄지는 아예 조사하지 못했으며, 발굴조사 종료 후 유물정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보고서 작성기간이 짧아 몽촌토성의 실체를 밝히는 데 여러 장애가 되었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몽촌토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풍납토성과의 축조 시기 선후관계도 해명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둘째, 몽촌토성에 왕궁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구조는 어떠한 것인지 밝혀야 한다.
셋째, 80년대 발굴된 유구에 대한 재조사가 필요하다. 최근 목책에 대해 성벽을 쌓을 때 사용한 영정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또한 서남지구에서 발견되 지상건물지의 건축 주체에 대해서도 백제설과 고구려설로 나뉘고, 성 내부에서 발견된 적석토광묘와 움무덤에 대해서도 투석용 시설과 제사유구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발굴된 유구에 대한 재조사를 추진하여 추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개발속에 묻힌 백제
1970년대 잠실지구 개발을 시작으로 송파 일대 백제유적의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1년 서울올림픽유치가 확정되고 몽촌토성을 비롯한 백제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올림픽을 계기로 벌어진 일련의 발굴조사는 행사를 위한 구제발굴이었을 뿐, 백제유적에 대한 장기적인 보존과 활용까지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숨가쁜 개발 속에 풍납토성은 학교와 공장, 아파트단지 등이 빠르게 들어서 인구 4만명이 살게 되었다. 석촌동 고분군은 1985~1988년에 복원사업을 벌여 사적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원래의 묘역보다 훨씬 줄어든 일부만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부지로 지정되는 바람에 난개발의 수난에서 비켜섰지만, 유적공원이 아닌 문화체육시설로서 올림픽공원의 산책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의 몽촌토성 발굴재개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 한성도읍기를 조사연구하고 서울의 백제유적을 보존.활용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기초작업을 위해 2013년 9월 백제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백제학연구소는 앞으로 몽촌토성을 지속적으로 발굴조사하고 백제사 관련 자료를 종합관리하는 연구센터로서 백제학 연구의 허브역할을 할 것이다. 2013년 11월 8일 30년 만에 몽촌토성 북문지 안쪽 평탄지에서 몽촌토성 발굴을 재개하였다. 몽촌토성은 아직 백제 때의 경관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으며, 내부 중앙 평탄지의 유구가 훼손되지 않은 상태이다. 한성백제박물관은 앞으로 몽촌토성 정밀 학술발굴을 통해 백제 한성도읍기 왕도의 모습을 차근차근 복원해 나갈 것이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발굴조사방법
발굴조사는 지표조사.시굴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유구의 성격을 밝히는 본격적인 조사활동이다. 본격적인 조사방법은 유구에 따라 달라지는데 트렌치법, 사분법, 방격법이 있다. 트렌치법은 일명 도랑파기법이라고도 하는데 유적에 긴 네모꼴의 트렌치를 구획한 후 땅을 파는 방법이다. 넓은 지역을 동시에 조사하기 때문에 유적의 성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사분법은 주로 무덤을 발굴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봉분 정상부를 중심으로 4등분한 뒤 둑을 남겨두고 엇갈려 마주보는 부분을 차례로 발굴하는 방법이다. 방격법은 일종의 바둑판식 발굴법이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기준점을 중심으로 x축, y축을 직각으로 설정하고 일정한 간경의 정사각형 그리드마다 조사하는 방법이다. 집터, 마을터, 절터 등 넓은 지역을 발굴할 때 쓴다.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면 사진기로 촬영하고 도면으로 그리며 날짜, 위치, 수습정리한 사람의 이름 등을 기록한다. 유물은 유물봉투에 넣어 옮기는데, 나중에 실내에서 세척하고 출토지와 번호를 작게 시입해야 한다. 야외조사가 완료되면 실내에서 유물을 실측하고 도면을 정리한다. 이후 유적 조사과정, 유구와 유물의 출토양상, 의미 등을 분성 고찰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문화재청에 제출하면 비로소 발굴조사가 완료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고고학자들의 발굴조사 모습

고고학자의 발굴도구,
유적을 체계적으로 발굴하려면 각종 장비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발굴장비는 용도에 따라 측량도구, 발굴도구, 운반도구, 기록도구, 촬영도구 등으로 나뉜다.


레벨(Level),
유적의 위치별 해발고도를 측정할 때 사용한다. 삼각대를 세우고 수평을 맞춘뒤 이용한다. 한 명은 높이를 알고다 하는 곳에 함척을 세우고 다른 한명이 레벨기에 눈을 대고 레벨값을 읽는다. 보통 유적 주변에 있는 BM점을 참고하는데, 기준점과 유적의 고도차이를 측정해서 유적의 높이를 알고자 할때와 유구.토층의 단면선을 측정할 때 사용한다.
트래싯(Transmit), 각도를 측정하는 측량도구이다. 삼각대를 세우고 수평을 맞춘 뒤 이용한다. 발굴할 지역을 일정하게 구획하는데 유용하다.
토탈스테이션(Total station), 흔히 광파라고 부르는데, 기존의 각을 재는 트랜싯 기능에다 거리를 잴 수 있는 광파의 기능이 더해진 측량도구이다. 한 명은 삼각대를 세우고 그 위에 수평을 맞춘 후 광파를 세운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이 반사경을 끼운 폴대를 광파에 비추면 반사되는 빛으로 지점 간의 거리를 측정한다. 정확하고 빠른 정보처리가 특징이다.
함척.폴대, 레벨기.트린싯,광파를 사용할 때 함께 사용한다. 거리, 높이를 알고자 하는 지점에 찍으면 측량도구가 높이나 거리를 읽을 수 있다.


줄자.삼각자, 유구가 확인되면 길이와 높이를 측정할 때 사용한다.
대칼.붓, 유물을 수습할 때 이용하는 도구들이다. 유구 내부에서 유물이 확인되면 흙덩이를 조심스럽게 제거하기 위해 사용한다.
트라울, 날카로운 손칼모양의 도구로 주로 토층을 긁거나 유물수습, 토층선, 유구선을 긋는데 사용된다.
그밖에 유물을 촬영하는 카메라, 유구 및 유물 출토 상황을 실측하는 필기도구와 방안지, 유물을 수습하는 유물봉투.유물박스 등이 사용된다.


사진기


조사일지


발굴조사 장비


현미경

백제를 꿈꾸다, 내일
1970년대 백제유적이 산재한 송파구 일대는 그야말로 '뽕나무밭이 푸른바다로 변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변화를 맞이하였다. 한강의 물줄기가 갈라졌고, 한가롭던 농촌마을은 높고 빽빽한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의 주택밀집지역으로 바뀌었다. 그 사이 땅속에 잠들어 있던 백제으 숨결은 기계음과 콘크리트 포장 속에 묻혀갔다. 인구 4만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가 된 풍납토성과 도로공사로 고분 한가운데가 뻥 뚫린 석촌동고분군은 고도 성장기에 벌어진 문화재 수난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에 비한다면 몽촌토성은 운이 좋았다. 서울올림픽이라는 국제행사를 계기로 난개발의 마수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6년간의 발굴조사로 1천5백년의 깊은 잠에서 깬 몽촌토성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몽촌토성이 백제의 왕성이었음을 아는 이는 여전히 많지 않다. 올림픽 공원의 아름다운 숲고 산책로의 일부로만 여기고 무심코 지나치는 이가 많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전시장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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