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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 정복사업으로 새로 차지한 영토인 창녕.북한산.황초령.마운령 등에 세운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말하며, 단양 적성비(赤城碑)는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세운 것으로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 비석에는 진흥왕이 신라영역으로 새로 편입된 지역을 돌아보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에 충성한 자들을 포항하며, 신하들이 함께 축하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북한산비는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에 의해 그 내용이 확인되었으며 북한 지역에 있는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일제강점기 최남선이 그 내용을 조사하여 확인하였다. 순수비(巡狩碑)는 국왕이 그 지역을 방문하였다는 내용의 '순수(巡狩)'라는 글자가 비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이에 해당한다. 창녕에 있는 비석에는 '순수'라는 글자가 없어 척경비(拓境碑)라 부른다. 6세기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함경도 해안지역까지 진출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서울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북한산 순수비(국보 3호)이다.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 백제와의 경쟁을 이기고 한강유역을 장악한 후 북한산을 방문하면서 그 내용을 새겨 놓은 것이다. 진흥왕의 영토확장에 대한 활약과 강력한 왕권, 당시의 관직제도와 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래 북한산 비봉에 있었는데 현재는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창녕 척경비가 건립된 561년과 황초령비가 세워진 569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는 직사각형의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들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비몸의 크기는 높이 1.54 m, 너비 69 cm이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제3호), 서울 북한산 비봉>

진흥왕 순수비는 조선후기 순조 때(1816년) 추사 김정희가 발견하여 그 내용을 판독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비에는 모두 12행으로 행마다 32자의 글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비석이 세워져 있던 북한산 비봉>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리원군 마운령에 세워져 있던 마운령 순수비(북한 국보 111호)이다. 16세기말 발견되어 고려 윤관의 비로 알려졌으나 일제강점기 1929년 최남선이 그 내용을 확인하면서 진흥왕 순수비임이 알려졌다. 비석은 높의 1.36 m로 북한산 순수비와 비슷한 형태이다. 현재는 함흥시 함흥본궁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진흥왕 순수비 중 그 내용이 가장 풍부하다고 한다. 

568년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선정을 칭송한 부분, 변경지역을 두루 순수하고 백성들에게 훈시한 사실, 진흥왕을 따라 왔던 신료의 관직과 이름을 기술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마운령비는 진흥왕이 영토를 함경도 함흥지역까지 넓혔음을 알려주는 증거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대창이라는 연호의 사용, 6부명, 관직과 관등, 인명은 중고기 신라의 정치사 및 제도사를 이해하는 데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워져 있는 진흥왕 순수비(북한 국보 110호)이다. 568년 진흥왕이 이 지역을 순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조선시대 그 소재를 모른 채 탁본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김정희가 1882년 함경감사에게 부탁해 피편을 찾아낸 후 1852년에 황초령 아래 진흥리로 옮겨 복원하고 비각을 세웠다. 윤정현은 그 내력을 기록한 이건비를 함께 세웠고, 김정희에게 글씨를 부탁하여 "진흥북수고정"이라는 헌액을 걸었다. 현재 황초령비는 마운령비와 함께 함흥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 내용에 진흥왕을 수행한 인물이 마운령비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초령 순수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0년>

창녕 진흥왕 척경비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창녕 척경비(국보 33호)이다. 신라가 창녕지역을 편입한 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은 자연석 앞면에 비문을 새겨두고 있다. 앞부분은 닳아서 잃을 수 없지만 뒷부분은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순수비처럼 이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통치이념 등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반부에는 수행하던 신하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문 내용중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단양 적성비와 함께 척경비로 일컫고 있으나, 비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의 순수비와 동일한 성격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척경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기 1년 전으로 대가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 척경비(국보 33호)>
<창녕 척경비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1년>
<옆에서 본 모습>
<비각에 세워져 있는 창녕 만옥정공원>

단양 신라적성비

단양군 단성면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 적성비(국보 198호)이다. 1978년에 땅속에 묻힌 채 발견되었다. 자연석 형태를 하고 있으며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거의 판독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들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에 언급된 사람들의 이름과 관등을 『삼국사기』의 내용과 비교해 볼 수 있으며 진흥왕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양 신라적성비(국보 198호)>

땅속에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기때문 새로 만든 비석처럼 글자가 깨끗하고 선명하다. 신라 장군 이사부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비석 탁본, 중앙박물관특별전, 2009년>
<단양 적성산성 내 비각>
<단양 적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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