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건설한 신도시인 수원 화성의 서쪽편에 위치한 팔달산 정상 서장대 아래에서 동쪽인 창룡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행궁이다. 행궁은 왕이 한양 도성의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으로 국가가 위급할 때나 각지에 흩어지 왕릉을 행차할 때 잠시 머무는 공간으로 수원 화성의 행궁은 화성에 위치한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을 방문할 때 잠시 머무를 목적으로 수원 화성과 함께 건설되었다. 수도인 한양 부근에는 여러 곳의 행궁이 있었지만, 그 규모면에서 화성행궁은 궁궐에 준하는 규모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화성행궁은 연회를 베풀던 누각인 낙남헌을 제외하고는 없어졌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옛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 있다. 수원화성은 지방관직 중에 높은 직급인 종2품의 화성유수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화성유수부에는 군사조직인 장용영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화성 행궁은 공식적으로는 국왕의 별궁이자 화성유수의 근무처이자 숙소로 정전격인 봉수당을 제외하고는 다른 건물들은 화성유수가 사용하게 되어 있다.
화성행궁의 정전격인 봉수당.
화성행궁의 구조는 앞쪽으로 긴 형태의 장방형 구조이며,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군사조직인 장용영 소속의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다. 신풍루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는데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이들 조직은 화성유수부 소속 관청이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정조대왕의 행차를 준비하고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행궁의 중앙에는 정전인 봉수당이 있고, 왼쪽편에는 화성유수와 행궁의 숙소들이 있다. 봉수당 동쪽편으로는 연회장으로 쓰이는 누각인 낙남헌과 활터가 있고, 그 옆으로 후대에 세워진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이 있다. 비록 대부분이 복원된 건물들이지만 조선 후기의 지방 관청과 행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1.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2층누각을 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관찰사가 있던 감영이나, 목사가 있는 목, 부윤이 있던 부 등 규모가 큰 지방행정 기관의 출입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화성행궁의 성격이 수원유수부 부윤의 집무장소이기 때문이다.
신풍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삼문형식으로 된 좌익문이 나타나고 좌.우에 수원행궁 부속관청과 남.북군영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의 정전격인 봉수당이 있어 지방관청이지만 여기서부터 궁궐의 격식을 갖추는 것으로 보인다.
화성 행궁 앞 광장
화성행궁 마당의 느티나무
2. 화성 행궁 정전격인 봉수당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 동헌건물로 원래의 이름은 정남헌이었다 한다. 정조는 화성행차시 이 곳에 머무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정면 9칸의 대형 건물이지만, 월대는 궁궐건물 전각보다 낮고, 지붕 귀마루에 잡상을 올려놓음으로써 궁궐건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곳 봉수당에서는 정조대왕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비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렸다고하며 이 곳에 그 모습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부터 있던 화성행궁 건물은 아니고 1997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봉수당 내부
봉수당 출입문인 중앙문. 가운데 정문과 좌.우에 협문을 두고 있는 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궁궐의 의미를 갖게하는 출입문이다.
3. 화성 행궁 침전으로 쓰였던 장락당
화성행궁 장락당은 행궁의 침전으로 쓰였던 건물로, 봉수당 남쪽에 세워졌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할 때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정전이자 편전건물인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으며, 행궁으로써 많은 방을 두고 있지는 않다.
경룡관은 장락당을 출입하는 바깥문으로 2층누각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2층에는 누마루가 있고 그 아래로 출입하는데 지락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4. 화성유수 거처인 복내당
화성행궁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이자 실제 이 곳을 집무를 보던 화성유수 가족이 거처하던 내아이다. 화성행궁의 성격자체가 국왕이 잠시머무르는 행궁의 성격과 수원화성을 책임지던 화성 유수의 집무공간이었던 까닭에 이 곳 화성행궁 복내당은 화성유속 가족들이 거처하던 주택과 행궁을 방문하는 국왕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의 숙식을 지원해야하는 역할이 있었다. 그래서 복내당은 행각들이 상당히 많고, 국왕이 잠시 거처하던 봉수당과 장락당이 바로 붙어 있다. 아마도 정조대왕 시절에는 화성유수부 가족들이 거처하는 공간이었지만 실제로 거처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국왕을 보필하는 인원들이 이 곳 복내당에 머무러면서 행사를 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복내당에 있는 부엌
복내당 뒷마당.
5. 유여택, 정조대왕 집무공간이자 화성유수 근무처
수원화성 유여택은 정전인 봉수당 출입문인 중앙문 왼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평소에는 화성유수가 업무를 보며 머무는 공간으로 많은 신하들이 도열할 수 있도록 앞에 넓은 마당과 행각을 두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정도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건물로 오른쪽편에 누각을 두고 있다. 일반 관청건물의 성격에 당시에 유행하던 권문세가 대저택의 사랑채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 앞에는 월대를 두고 있으며, 누각 앞에는 해시계가 있다. 건물 중앙에 마루를 두고 집무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마루 양쪽에 방을 있다. 유여택 앞 마당은 궁궐 정전의 마당보다는 작지만 규모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여택의 누마루
유여택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주위로 행각들이 연결되어 있다.
6. 외정리소와 비장청
화성행궁 유여택 앞에 있는 외정리사. 사람이 근무하던 사무실과 같은 건물도 있고, 행사를 정리하기 위해한 많은 책자 등을 보관하기 위한 다락방으로 행각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물건들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성유수 막료들인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인 비장청
7. 남군영, 서리청
화성행궁 제일 앞쪽에 위치한 남군영 건물. 앞면 5칸 규모의 건물로 아마도 사무실과 지휘부가 숙직하던 장소로 생각된다. 복원된 건물이지만 당시 화성의궤에 워낙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기때문에 원형과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화성유수 하급관리들이 근무했던 관청 건물이 서리청. 현재 비장청 건물이 서리청이었나, 비장들에게 밀려났던 것으로 보인다.
8. 북군영, 집사청
장용외영 기병들이 숙직근무하던 북군영. 지휘부가 숙식하던 건물로 보이며, 주위에 행각들로 둘러져 있다.
수원 화성행궁 집사청 건물. 두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화성행궁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9. 낙남헌, 득중정, 노래당
화성행궁의 많은 건물 중에서 원래 있었던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낙남헌이라고 한다. 행궁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화성유수가 사용하는 건물과는 별개로 국왕 자신을 위해서 세운 건물로 보이면, 넓은 마루가 있고 앞 쪽에는 마당이 있어 행사하기 좋았던 장소로 보인다. 이 곳에서 정조의 화성 행차시 과거나 양로연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낙남헌 안쪽으로는 작은 정자건물로 지은 득중정
건물 뒷쪽편에는 정조자신이 양위 후 쉴 곳으로 마련한 노래당이라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10. 정조대왕 어진을 모신 화령전
화령전은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재실인 풍화당,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비상시 어진을 옮겨놓은 이안청,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령전은 1800년대에 세운 건물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으로 화령전 정전 내부에는 군복을 입고 있는 정조대왕의 어진이 있다. 조선후기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라 한다.
정조대왕 어진
11. 화령전 풍화당(재살), 전사청, 내.외삼문
화령전 풍화당은 재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전사청은 화령전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보인다.
화령전 내삼문
화성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조사 및 복원정비사업을 통해 조선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정조시대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위민과 개혁을 실천하고자한 역사적 공간이자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을 베풀었던 효의 상징적인 공간이며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중심축이다. <출처:문화재청>
행궁(行宮)은 왕이 항상 기거하는 도성의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別宮)이다. 행궁제도는 그 역사적 기원이 매우 오래되어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행되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제도화되어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많은 행궁이 건립되었다. 몇몇 행궁은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지어졌다. 강화행궁(江華行宮), 광주행궁(廣州行宮), 양주행궁(陽州行宮), 전주행궁(全州行宮)이 그 예로, 이들은 왕이 전란을 피해 국정을 돌볼 수 있게 하고 선대 임금들의 영정(影幀)과 왕실일가를 보호하며 왕실의 귀중한 물건과 문서들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화행궁은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던 강화 고려이궁지(高麗離宮地)에 세워졌는데,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을 당해 임금이 종묘 사직의 신주와 대비를 모시고 이곳에 피난하였고 병자호란때에는 세자를 비롯한 왕실일가족이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또 강화행궁에는 장녕전(長寧殿)을 두어 숙종과 영조의 어진(御眞)을 모시었고, 정조5년(1781)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세워 강화부에서 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중요한 서적들을 비치하였다. 남한산성의 광주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머물며 항전한 곳이다. 양주행궁은 숙중37년(1711) 북한산성 성역을 마치고 산성 내에 지었는데, 실제로 임금이 피난처로 이용한 바는 없으나 북한산문고를 두어 실록의 사본, 의궤, 조선 역대 왕들의 옥쇄 등을 보관하였다. 전주행궁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모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유사시에 이봉(移奉)하는 처소로서 전주 동쪽 위봉산의 산성 내에 건립되었다. 행궁은 왕이 능행이나 휴양을 위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의 거처로도 이용되었다. 임금의 행차는 주로 능원 전배를 목적으로 하였으므로 왕실의 능원이 위치하는 경기도 일원에는 이천행궁(利川行宮), 파주행궁 (坡州行宮), 고양행궁 (高陽行宮), 풍덕행궁 (豊德行宮) 등 여러 행궁이 있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은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를 위해 조성되었고, 남한산성의 광주행궁도 여주 영릉(寧陵) 및 광주 헌릉(憲陵) 능행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임금의 거동은 질병치료와 휴양을 위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온정(溫井)이 있는 온양(溫陽), 이천(伊川), 고성(高城)과 초수(椒水)가 난다는 청주(淸州), 목천(木川), 전의(全義)에는 왕의 휴양을 위한 행궁이 건립되었다. 특히 온양행궁은 조선 초 세종이래 온천지로 이름나 역대 왕들이 즐겨 찾았는데,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 이상을 이곳에서 휴식과 치료를 하면서 국정을 돌보았다. 왕의 행차에는 여러 날이 소요되기도 하였으므로 그 길목에 잠시 묵거나 쉬어갈 용도로 행궁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주필소(駐?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행차에 소요되는 비품을 미리 비치해 두어 민폐를 줄이고자 하는 뜻을 담고있기도 하였다. 온양행궁을 방문하는 여러 임금들은 과천(果川), 수원(水原), 진위(振威), 직산(稷山)의 행궁에서 유숙하였다. 또한 화성 행차 길에는 과천과 시흥(始興)의 행궁이 숙소로 사용되었고, 사근참(肆覲站), 안양(安陽), 안산(安山) 등지에 쉬어갈 곳이 마련되었다. <출처: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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