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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73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화려한 생활용기, 당삼채를 비롯한 당대 도자기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 해당하는 장안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왕조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도시로 중국을 통일 진나라, 이를 계승한 한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하고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당나라가 수도를 삼았던 도시이다. 장안은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도시를 지리적.역사적인 면에서도 국제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도시이다. 장안이 초기 중국의 많은 왕조들이 수도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고대 이래로 흉노를 비록한 서역과 북방 유목민들의 위협이 거셌기때문에 이를 제압할 수 있는 국경과 가까운 곳에 도시를 건설해야 했고, 이들 유목민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강력해진 장안 주변의 세력들이 혼란기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당나라 이후 서역의 유목민 세력이 약해지고 동..

지역박물관 2012.06.22

[중국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당대 명품전] 국제도시 장안과 실크로드

경주박물관에서는 2012년 봄 한.중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을 열었다. 이 특별전에 중국을 대표하는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 13왕조의 수도였던 서안(장안)시에 있는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문화재 중 당나라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이 특별전을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으며,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던 당나라때의 장안사람들들 생활모습과 국제도시 장안의 성격을 보여주고, 동시기 존재했던 통일신라문화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특별전에서는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과 주변지역에서 출토된 생활용품, 건축부재, 불상 등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당나라를 대표하는 유물인 당삼채와 도자기를 제외하고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서역..

지역박물관 2012.06.19

[경주박물관 미술관]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갖춤과 지진구

경주 황룡사는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으뜸가는 사찰로 진흥왕때 짓기 시작하여 선덕여왕 때 완성되었다. 황룡사에는 신라의 삼대 보물 중 두가지인 금당에 안치된 금동장륙존상과 구층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승려 자장의 권유로 세운 높이 80여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로 몽고의 침입으로 1238년에 불타버리기까지 약 600여년의 세월 동안 경주 도심에 우뚝서 있으며 경주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웅장한 구조물이었다. 탑(Pagoda)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쌓은 구조물로 스투파라고도 한다. 탑은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유래했으며, 인도나 서역에서는 반구를 뒤집어 놓은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나, 중국을 거치면서 목조건축물 형식으로 바뀌었고 이후 중국에서는 벽돌로..

지역박물관 2011.11.07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금석문, 석경과 이차돈 순교비

삼국시대에는 진흥왕순수비, 남산신성비 등 국가정책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새겨 놓은 비석을 많이 활용하였는데, 이는 경주를 비롯한 특징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영역에서 고루 분포되고 있어 비석이 통치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비석에서는 당시의 관직,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사회 체제가 안정됨에 따라 국가 통치를 위한 비석의 필요성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며, 이때부터는 왕이나 특정 인물의 업적을 찬양하는 목적으로 세운 비석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며, 비석의 이런 특징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부처의 사리를 모신 석탑의 건립은 점차 줄어드는 경..

지역박물관 2011.11.06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금석문, 글자가 새겨진 비석, 임신서기석(보물 1411호)

기원전 57년경에 건국된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세력을 장악하여 백제, 고구려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루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신라는 내물왕 때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倭)를 격퇴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지증앙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제도가 더욱 정비되면서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호칭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이후 법흥왕대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통치질서를 확립하면서 중앙집권체제을 완비하고, 김해지역 금관가야을 정복하여 한반도 동남부지역에서 그 세력을 확고히 하였다. 신라에서 문자를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삼한시대 출토 유물에서 한자를 사용한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자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

지역박물관 2011.11.05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조각, 금동불상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28호)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좁게는 여래상, 넓게는 보살상과 신장상까지를 포함한다. 불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또는 마투라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불교의 전파경로에 따라 서역과 중국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불상은 석재를 조각한 석조불상, 금속에 황금빛 도금을 한 금동불상, 철로 만든 철불상, 나무로 만든 목조불상 등이 있다.금동불은 동과 주석,납 등의 합금에 금도금을 입힌 불상으로 동의 제련, 합금, 주물, 도금 등 고도의 숙련된 주조기술과 고가의 재료인 동과 밀납을 필요로 한다. 금동불은 상당한 비용과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고 내구성이 뛰어났기때문에 많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불상은 그 용도에 따라서 수cm 작은 금동불..

지역박물관 2011.11.01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조각, 석조불상

불상이라 함은 부처의 형상을 회화.조각 등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조각상을 말한다. 불상에서 말하는 부처라 함은 여래의 상을 의미하는데 그 범위를 넓혀서 보살상, 신장상 등도 불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상은 불교가 탄생한 이래 수백년 동안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원래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Pagoda)이나 보리수,금강보좌 등이 불교신앙의 대상이었으나 불교가 서역을 통해서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나 이집트 등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역과 인도의 마투라라는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전파되었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 보여지는 부처의 형상인 불상에서는 사실적인 면이 강조되지 않아서 그리스나 헬레니즘문화권의 조각상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불상이 처음 생..

지역박물관 2011.11.01

[경주박물관 미술관] 사리갖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와 감은사 사리갖춤(보물 366호)

사리(舍利)는 부처나 성자의 유골을 의미하며, 사리를 숭배하는 신앙은 불교가 처음 생긴 이래로 성행했다. 석가모니가의 사리를 8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탑을 세운 것이 불탑의 시초이며, 아소카왕이 이를 세분하여 8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되기 이전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탑을 중심으로 사찰의 가람을 배치하였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Pagoda)은 인도나 서역에서는 반구를 엎어 놓은 모양이었으나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전각의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 목탑의 형태를 하게 되었다. 목탑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 비슷한 형태로 많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중국에는 벽돌로 쌓은..

지역박물관 2011.10.31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절터 출토 기와,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그 중 불국사는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법흥왕때인 527년으로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국가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경주에는 7처가람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기던 숲이 있던 곳에 큰 사찰들이 들어서게 된다. 경주 동쪽편의 분황사와 황룡, 남쪽편 낭산 끝자락에 세워진 사천왕사, 서쪽편 오릉 주변의 영흥사, 영묘사, 담엄사, 흥륜사가 있다. 특히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능이 있는 오릉 주변에 많았다는 것은 불교 공인을 반대한 세력을 박씨들이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원래 경주의 중심이 오릉 주변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칠처가람에서 ..

지역박물관 2011.10.30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 미술

신라에 불교가 받아들여진 것은 고구려를 통해서 눌지왕때인 5세기 중엽이었으나 실제로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법흥왕 때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서이다. 이전까지 신라인들은 고분에 껴묻거리와 경주 낭산으로 비롯하여 지배계층이 신성시 여겼던 숲 등을 통해서 고유의 신앙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 불교는 왕실과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 내물마립간 이후 찬란하게 꽃피웠던 황금문화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자리를 굳히면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립간시기에 대릉원 일대 고분을 조성하는데 쏟았던 노력과 열정을 경주 각처에 사찰을 건립하는 데 쏟음으로써 화려한 불교 유물들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당시 신라..

지역박물관 2011.10.29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통일신라 기와, 불교공예품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들은 마립간시기 고분에서 껴묻거리로 출토되는 금관을 비롯한 다양한 금속장신기와 토기들일것이다. 이런 껴묻거리를 무덤에 묻는 문화는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서 많이 약해진 것으로 보이며, 불교국가로 변신하기 시작한 법흥왕대 이후에는 이전에 고분을 조성할 때 쏟았던 노력과 관심이 사찰을 건립하고 유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은 황룡사, 불국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을 세웠으며, 그 중 일부가 석탑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문화재로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신라의 문화재 가운데 그 비중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절터나 건물터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와들에서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신라의 미소'라고도 일컫어지는 영묘사 절터에서 발견된 ..

지역박물관 2011.10.27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삼국시대 장신구

신라 내물왕에서 지증왕 이전까지는 왕의 호칭이 마립간이었으며, 이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왕을 부를때 사용하는 '칸'이라는 호칭과 비슷한 유래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월성 북쪽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의 고분들은 대체로 마립간시기에 조성된 것들로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껴묻거리들을 무덤에 함께 묻었다.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여러 고분들에서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화려했던 당시 신라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국은 기념실에서는 공식적인 발굴.조사작업을 통해 출토된 유물 이외에 개인적으로 수집했던 것으로 보이는 삼국시대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실에 전시된 신라의 장신구들도 그 종류가 다양한 편이며, 당시 신라인..

지역박물관 2011.10.25

경주 성덕대왕 신종 (국보 29호), 에밀리종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동종인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일명 '에밀레종'라 불리는 국보 29호로 지정된 성덕대왕 신종이다. 이 성덕대왕 신종은 크기 뿐 아니라 동종에 장식된 문양 또한 상당히 아름답다. 종의 상하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넓은 띠가 있고 가운데에는 가장 인상적으로 아름다운 두쌍의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종을 만들때 아기를 시주했다는 전설 때문에 어린애들에게는 상당한 두려움을 주는 유물이기도 하다. 처음 볼 때는 종 전체만 보았다가 점차 이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무늬 장식이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문화재이다. 이 종은 우리나라에 남이 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5m로 전체 중량이 18.9 톤에 이르는 큰 종이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만들려고 했으나 뜻..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토기, 기마인물형토기 (국보275호)

국은기념실에 전시된 유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유물인 국보 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토기를 비롯한 토기들이다. 기마인물형토기는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가야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기마인물형토기는 나팔모양의 받침 위에 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말을 탄 무사의 형상을 올려놓고 있는데 그 표현방법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당시 가야무사의 모습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무사는 머리에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뒤쪽에는 중앙아시아 유목민들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각배가 있다. 기마인물형 토기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에서 삼국시대의 그릇받참까지 다양한 양식의 토기류들도 같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 중 경주 교동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오리모양토기는 경주지..

지역박물관 2011.10.24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초기철기시대 청동기 유물, 경주 죽동리 출토유물 (보물 1152호)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중국 요하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과 한반도를 주무대로 하여 기원전 15세기 무렵에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당시 지배층의 무덤인 고인돌과 요령식동검이라고도 하는 비파형 동검의 분포지역과 비슷하며 유사한 문화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들은 한.중.일 해상무역로를 따라서 고조선을 비롯하여 한반도 남부의 삼한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비파형 동검, 한국형 동검, 청동투겁창 등 무기류와 청동방울 등 의기류, 생산도구, 수레부속구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실제로 칸돌칼이나 벼농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이들 청동기들은 실제로는 의례용이나 신분을 상징하는 목적으로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역박물관 2011.10.22

[경주박물관 국은기념실] 청동기시대의 석기, 돌을 갈아서 만든 생활도구

경주 박물관 고고관에는 경북대 의과대 교수를 지내면서 경북지역 문화재를 발굴조사에 많은 공을 기울였으며 경주박물관에 666점의 문화재를 기증한 국은 이양선박사 기증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을 두고 있다. 기증문화재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기증 유물 가운데 '말타무사모양 토기'는 국보로, '죽동리출토유물'과 '옻칠발걸이'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기중 유물가운데 석기로 분류된 것은 신석기시대 이전의 유물은 아니고 주로 청동기시대에 사용했던 돌로 만든 도구들이다. 마제석검이라고 부르는 청동기시대 많이 사용된 검에서 부터 화살촉.창.도끼,반달돌칼 등 동시대에 경북지역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석기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돌로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

지역박물관 2011.10.20

[경주박물관 고고관] 도장무늬토기, 뼈항아리

4~6세기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엇갈린 구멍을 뚫은 굽다리그릇을 비롯하여 많은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 토기들은 회전판을 이용하여 빚은 뒤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 이전의 토기보다 얇으면서도 단단하며 전문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6~7세기가 들어서면서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었던 토기가 많지 않거나 발굴된것이 많지 않아서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7세기 이후에 신라의 토기는 표면을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게 되는 이를 무늬가 새긴 도장으로 무늬를 찍었다고 하여 인화문토기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토기는 일상생활에 사용했던 토기들도 많고, 무덤의 껴묻거리라기 보다는 불교식 장례풍습인 화장이 성행함에 따라 뼈가루를 담았던 뼈항아리들이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어며 그 중 가장 발달한 형..

지역박물관 2011.10.20

[경주박물관 고고관] 문자의 사용, 서역과의 교류

신라에 한자가 언제 전해졌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마립간시기인 4~5세기대에 고구려와의 교류를 통해 한자 사용이 확산되어진 것으로 보이며 많은 유물들이 동시대에 조성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글자가 적힌 청동그릇들이 출토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진흥왕대 이후에는 진흥왕순수비를 비롯하여 각종 비석에서 당시 사람들의 문자 생활을 엿 볼 수 있다. 문자를 사용하다 문자는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고 전달합니다.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문자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신라인은 한자로 기록하였는데, 언제 한자가 전해졌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습니다. 4~6세기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한자가 쓰여진 부장품들이 발견되고 있어, 한자를 활발히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세기가 되면 포항 냉수리비나 진흥왕순수비, 남산신..

지역박물관 2011.10.17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토용과 십이지신상

신라의 유물은 삼국시대 내물마립간대부터 시작한 황금문화시기에 조성된 경주도심 대릉원 일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후 불교를 받아들이고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는 사찰건립 등에 많은 자원을 쏟아부었기때문에 이전 시대에 비해서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은 유물은 많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무덤에서 껴묻거리로 출토된 유물 중 대표적인 것 사람이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용과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역할을 기대했던 십이지신상일 것이다. 토용에서는 당사 사람들이 입었던 의복이나 복식 등을 알 수 있으며, 함께 출토되고 있는 수레 등 생활용품에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주 용강동에서 출토된 여인상과 문인상은 통일신라 복식에 대해서 알려주는 대표적인..

지역박물관 2011.10.16

[경주박물관 고고관] 4~6세기 신라토기, 독무덤, 수레모양토기

신라토기는 4세기 후반에 다리에 엇갈린 구멍을 뚫은 굽다리토기가 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되는데 회전하는 물레를 사용하여 형태를 빚은 뒤 1,000도 이상의 고온으로 밀폐된 가마에서 구워서 얇고 단단한 그릇을 만들게 된다. 신라토기는 그릇 종류로 큰 항아리, 굽다리접시, 잔, 그릇받침 등 다양한 종류가 출토되고 있으며 가야 토기에 비해서 직선적인 것이 특징이다. 4~6세기에는 경주 월성 북서쪽으로 많은 왕이나 귀족층 등의 무덤들이 많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들 고분에선 금관을 비롯한 금속세공품과 더불어 상당히 많은 양의 토기들이 같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황남대총에는 4천여점의 토기들이 껴묻거리로 묻혀 있었다. 고분에 묻힌 토기들은 다량의 껴묻거리를 만들기 위해 대량생산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 사용하..

지역박물관 201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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