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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월성(반월성)은 지금은 나무가 울창한 평범한 야산처럼 보이는 곳이지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수도 경주의 궁궐이 있는 성으로 성벽은 자연 지형을 이용한 곳도 있고, 흙과 돌을 쌓아 놓은 부분도 있는 국왕이 살고 있던 도성이었다. 고려이후 통일된 국가에서는 평지에 궁궐을 쌓지만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전쟁이 많았기때문 안전한 요새처럼 성벽을 쌓고 그 내부에 궁궐을 짓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성벽은 석축형태로 쌓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으며, 자연지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경주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별궁이었던 임해전지가 있고, 북쪽으로는 신라 초기 왕들의 왕릉과 계림, 첨성대가 있다. 남쪽은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천연의 해자 역할을 했고, 그 하천을 건너서 왕성인 경주 월성을 출입하는 월성교가 있었다고 한다.

1. 경주 월성 해자와 월성교(모형)

경주 월성 동쪽편 임해전지와 연결되는 성문 주위 경주 박물관 방향으로는 해자시설을 복원해 놓고 있다. 아마도 월성 전체를 이런 형태의 해자로 둘러쌓여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며 월성을 둘러싼 해자들은 지금 현재 단계적으로 복구되고 있다.

월성 해자 복원 현장

복원이 완료된 월성 북쪽편 해자 시설.

경주 월성에서 계림과 첨성대가 있는 곳으로 통하는 월성(반월성) 정문 서쪽편의 해자. 아직 발굴/복원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곳이지만 해자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경주 월성(반월성) 서남쪽 해자위에서 설치되었던 월정교 복원을 위해 제작한 모형인데 상당히 아름다운 시설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 경주 월성을 둘러싼 성벽

경주 월성의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기때문에 자연 지형 그대로인 것처럼 보인다. 백제의 토성은 흙으로만 쌓은데 비해 월성은 돌을 섞어서 쌓아서 월성에는 큰 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월성 동쪽편 별궁인 임해전지와 연결된 성문과 주위의 성벽

월성 북쪽인 계림, 대릉원, 첨성대와 연결된 성문

대릉원에서 본 월성 북쪽편 성벽, 지금 보기에는 자연적으로 존재했던 야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성벽들은 흙과 돌로 쌓아서 인공적으로 성벽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경주 박물관에 전시된 통일신라시대의 월성의 모습, 남쪽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있고 반월성 내부에는 상당히 규모가 크고 궁궐 건물들이 있다. 반월성 내부의 궁궐 건물만으로는 부족해서 동쪽으로 별궁인 임해전을 짓고 반월성 남북쪽에도 별도로 궁궐 건물이 들어서 있다. 궁궐 내부에 사찰 건물과 왕릉이 존재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반월성 내부에 있는 궁궐터

3. 얼음을 보관하던 석빙고

경주 월성에는 우리가 어릴적 삼국시대 신라의 유물로 착각하고 있었던 조선시대 석빙고가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여러 석빙고 중에서 잘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내부는 시원해 보이고 지붕에는 3곳의 환기구가 있다.

4.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 탄생 설화가 담긴 계림

경주 궁성인 월성의 정문격이 북쪽 출입문을 나서면 서쪽편에 작은 숲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문화재로 분류할 수 있는 유적,유물이 발굴된 장소는 아니지만 신라 천년을 이끌어온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가를 간직하고 있는 계림입니다.



사적 제16호.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한다. 반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둘레 2,400m의 토석(土石) 혼축으로 남쪽은 남천을 끼고 자연지세를 이용해서 쌓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이사금 22)에 금성(金城)의 동남쪽에 성을 쌓고 월성이라 했으며, 재성(在城)이라고도 했는데 주위가 1,023보(步)였다고 한다. 이때 파사이사금은 거처를 월성으로 옮겼으며, 월성 북쪽에는 만월성(滿月城)이 있었다. 이는 월성을 쌓기 전에 왕이 살던 곳으로 짐작된다. 월성은 475(자비마립간 18)~487년(소지마립간 9)에 궁성을 명활성(明活城)으로 옮긴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신라 왕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초기 월성은 도성(都城)으로 출발했으나, 신라의 국가성장과정에서 인구 증가와 함께 대규모 고대도시로 성장하면서 궁성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741년(영조 17)에 축조한 석빙고(石氷庫)뿐이다. 성벽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서남쪽 월정교지(月精橋址)를 바라보는 곳이 가장 높게 남아 있다. 석탈해설화에 의하면 원래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던 것을 탈해가 꾀를 써서 빼앗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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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떼향기 2010.10.03 0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월성의 해자를 단계적으로 보수중에 있군요.. 이건 저도 몰랐던 사실인데...
    요즘 월정교를 복원하고 있는데 쓸 소나무가 없어서 캐나다 수입산을 쓴다고 하네요..
    전 이렇게 할바에야 안하는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천년전 조상님들의 소중한 정신을 외국산 소나무로 만들기엔
    좀 경박스럽지 않나 하고 생각이 드네요..

    • younghwan 2010.10.04 1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원이 좋은지, 현재의 모습으로 그냥 두는 것이 좋은지는 판단하기 쉬운 것은 아닌 듯 합니다만, 가능하면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하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