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중국실] 고대 중국의 도용, 불교 생활

younghwan 2012. 5. 11. 16:59
반응형


 도용은 중국에서 죽은이와 함께 묻는 인물.동물의 상을 말하며 명기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는 현실의 사람이나 가축 등을 본 떠 만들어 죽은이를 저승으로 호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순장의 풍습이 없어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도용은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토기의 형태로 많이 전해져 내려오며 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남겨놓고 있다.중국 도용 중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의 능에서 발견된 수많은 병사들이 대표적인 도용이라 할 수 있다. 전한시대에는 진시황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북조에서는 조형미가 풍부한 도용들이, 당대에서는 귀족생활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당삼채로 만들어진 도용들이 있다. 

고대 중국인의 생활 - 명기와 도용
중국은 전국시대 경제와 사회의 발전으로 순장제도가 사라지고 예기제도가 무의미해지면서 부장품의 종류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한대에는 후장제도가 유행하면서 귀족 무덤의 부장품 종류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한대 이전에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기, 마구류가 주로 매장되었지만, 한대 이후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실감나게 표현한 인물과 동물도용 제작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매장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따라서 박산향로 등 실제 사용된 생활용품과 함께 중국인의 생활을 그대로 묘사한 인물.가축.가옥.부뚜만.축사 등이 명기와 도용으로 제작되었다. 또 당나라 때는 후장제도가 부흥하여 삼채로 진묘수, 말, 낙타 등을 화려하게 제작하여 매장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뿔달린 말(Horse with a horn), 남북조시대,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머리에 뿔이 달려 있으면 유니콘 형상인데 날개는 보이지 않는다. 천마총의 천마도와 비슷한 시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기능도 비슷하지 않을 까 생각된다.


서역지방을 통해서 외국말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인 남북조시대까지는 다리가 짧은 중국 토종말 형태로 만들어지진다. 아래까지 늘어지는 화려한 안장을 하고 있으며 가습과 엉덩이에 장신구를 하고 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슬픈표정을 하고 있으며 마치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준마의 형상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12가지 수호신(호랑이, 뱀, 개), 당나라, 당나라 시대 당삼채로 만들어진 십이지신상으로 우리나라 십이지신상하고는 약간 다른 느낌이다.


황소(황우용) 당나라,
동한시기 화상석에서 우경의 모습이 보이며 수대부터 마차를 끌거나 경작에 이용된 소의 형상이 도용으로 제작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뿔과 골격이 사실적으로 보이며 지금의 황소 모습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로 우직한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낙타용, 당,
당대 초기 실크로드가 번영하며 무역이 성행하면서 낙타의 수요가 많아져 전리품, 조공, 상품으로 중국으로 대량 수입된다. 대부분 쌍봉낙타이고 단봉낙타는 아프리카 북부, 인도 등에서 직수입된 것으로 소량 출토된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인의 고대종교 - 불교
중국의 불교는 동한 명제때 인도에서 서역을 통하여 처음 전래되었다. 이후 북방의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중원지역에 왕조를 세웠던 남북조시대 지배층의 후원으로 많은 사찰이 건립되고 불교조각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당대의 불교 역시 지배층의 후원을 받으며 더욱 발전하여 대규모의 석굴 건축과 불상제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교통의 발달로 인도의 굽타 양식의 사실적인 균형미의 불상이 등장하였고, 불경내용을 그린 경변 고사화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석굴불상에도 영향을 미쳐 불상의 상호는 넓고 둥근 중국인의 얼굴로 표현되었다. 당대 이후 불교 신앙은 민간에 널리 정착되었다. 특히 송대 이후에는 석굴보다 사찰이 많이 건립되었고, 청대의 사찰에는 도교의 나한상과 시녀상이 나타나면서 불교가 더욱 세속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증장천황(A gurdian king), 송말원초(13~14세기)
이 신상은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불법을 수호하고 사방을 지키는 네 명의 천왕 중 하나인 증장천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 지물이 없어졌지만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쪽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방의 유리지방을 지키던 증장천왕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검은 유리로 제작된 동공으로 인하여 인상이 매우 강렬해 보인다. 정교한 귀면 문양이 허리에 장식된 갑옷을 입고 어깨부터 드러워진 천의가 팔을 휘감고 있어 전체적으로 위풍당당하고 매우 힘이 넘쳐 보인다. 머리카락은 푸른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봉황형상의 보관 뒬 끌어당겨져 높게 꼬여진 상투를 틀었다. 전체적으로 붉은색, 흑색, 청색, 녹생 등의 안료와 도금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다.


금동보살입상, 원말명초(13~14세기)


금동불좌상,
철조불좌상, 명나라, 철조불좌상은 명청시대의 도식화된 불상으로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변형된 선정인을 하고 있다. 머리도 도식적인 소용돌이형과 직선형 머리카락이 번갈아 표현되어 있다. 불상 뒷면에 "삼십구존/왕묘청"이란 명문이 있어 왕묘청이 시주한 여러 불상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수라상(금동삼면육비상), 청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팔부중의 하나인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귀신이다. 악귀의 세계에서 싸우기를 좋아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