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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백련사는 강진만을 굽어보고 있는 사찰로 고려시대 무인집권기 및 대몽항쟁기에 불교개혁운동인 백련결사운동을 이끌었던 사찰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초당과 인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백련사는 백련결사운동을 이끌었던 고려시대의 사찰이 계속 이어져 온 것은 아니고,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왜구의 침입으로 폐사되었다가 세종때 재건되었다고 한다.
 
 백련결사운동이란 고려시대 문벌과 결탁한 보수적인 교종세력에 맞서서 민중에 기반한 실천적인 불교를 표방했다고 한다. 당시 지눌이 주도한 선종 중심의 조계종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개혁운동이었다한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에 다산초당에서 가까운 이 곳 백련사를 자주 들러 차를 마시고 백련사 주지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하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많은 사찰이다. 이 곳 백련사 경내에 올라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면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을 갖게 한다.


1. 들어가는 길, 동백나무숲


강진만을 내려다 보고 있는 백련사는 고려말 백련결사운동의 중심지였던 사찰로 아름다운 숲과 강진만 바다를 볼 수 있는 매우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사찰이다. 특히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길 주변에 높이가 평균 7m나 되는 동백나무들이 천그루이상 있는 곳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동백나무숲의 조성에 다산 정약용선생이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알려진바는 없다고 한다.

2. 강당누각인 만경루, 강진만 풍경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유흥준씨가 책에서 언급한 바다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는 백련사에서 보는 강진만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백련사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강당 누각인 만경루이다. 만경루는 지은 얼마되지 않은 건물로 현재 백련사의 사찰규모에 비해서는 크게 지어진 건물로 축대를 쌓고 바다를 내려보는 약간 위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백련사 자체도 산속에 겸손하게 은거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 산 아래를 호령하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는 사찰인데, 책에서도 언급했든시 이 절의 기원이 고려 무신정권 실세였기 때문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백련사는 강진만을 내려다 보면 가슴이 뚫리면서 없는 기개도 생길 것 같은 곳이다.


백련사 경내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바다 풍경

3. 중심불전인 대웅전



백련사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은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여러 차레의 전란으로 수차에 걸쳐서 중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 효종때 중수된 건축물이라 한다. 그래서 조선후기에 건축된 여러 대웅전 건물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앞면3칸, 옆면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공포는 다포계이다.

4. 명부전, 웅진전, 요사채



백련사에는 중심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웅진당, 같은 불전들이 있는데 내력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웅진당은 부처님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의 다른 이름인데, 나한전이 있는 사찰의 경우는 방문하는 신도보다는 사찰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중시한다는 뜻인데, 불전이 약간 낡고 오래된 것으로 봐서는 백련사는 고려말 결사운동의 중심사찰답게 스님들을 중시하는 것 같다.

5. 백련사 사적비



강진 백련사사적비는 백련사에 있는 거의 유일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 비석이다. 고려시대부터 받침돌만 남은 비석위에 조선 숙종때 비석을 세워서 올린 아주 특이한 비석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비석 받침돌답게 거북형상의 받침돌은 조각이 아주 생동감있고 힘이 넘치게 새겨져있다. 바로 옆에 있는 최근 세운 비석과 비교해보면 조각 수법이나 전체적인 구도에서 차이가 많이 남을 느낄 수 있다. 몸돌과 머리돌은 조선후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의 말사이다. 일명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며 〈사기 寺記〉와 정약용의 〈만덕사지 萬德寺誌〉에 의하면 839년(문성왕 1)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한 뒤 1170년(의종 24) 승려 원묘(圓妙)가 중건·주석하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한다.1208년(희종 4)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은 원묘의 제자 원영(元營)은 1211~32년에 걸쳐 80여 칸의 대가람을 완공했으며, 이곳에서 요세(了世)가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조직했다. 고려말에는 왜구에 의해 페허화되었으나 조선 세종 때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 아래 가람을 재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나한전·만경루·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그외 유물로는 만덕산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이 있으며, 절 주위에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과 정약용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1216년(고종 3) 천태종의 승려인 요세(了世)가 중심이 되어 무인란 이후 변화한 사회와 불교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결사. 고려초의 불교계는 신라말부터 성장세를 보였던 선종이 계속 발전했으며 아울러 화엄종도 다시 등장했다. 이당시 불교계의 목표는 통치체제정비와 불교계의 통합작업이었다. 특히 화엄종의 균여나 의천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교종·선종의 통합을 시도했는데 실패했다. 그뒤 화엄종·법상종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교종세력이 불교계를 주도하면서 문벌귀족체제와 결탁했다. 무인정권은 문벌귀족이나 문벌귀족과 결합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시도했으므로 불교계는 대무인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대무인투쟁은 교종·선종을 망라한 것으로, 농민·천민의 난과는 달리 왕실 중심의 옛 지배체제를 복구하려는 것이었다. 최씨 집권기에 들어서 기존의 문벌체계와 결탁된 불교계에 대한 자각·반성의 성격을 띤 신앙결사가 전개되었다. 이중 대표적인 것이 지눌(1158~1210)이 개창한 것으로 뒤에 수선사(修禪寺)로 사액(賜額)된 정혜결사와 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이다. 천태종의 승려인 요세는 처음에는 지눌과 같이 수선을 통해 불교계를 비판하는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두었지만, 그뒤 천태의 묘해(妙解)의 참뜻을 깨닫게 됨으로써 입장이 달라지게 되었다. 요세는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실천방향으로 강조하고, 지눌의 선사상과 달리 농민·천민층을 포함한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했다. 그결과 정토신앙이 민중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요세는 1216년 전라남도 강진 토호세력의 도움을 받아 강진 만덕산(萬德山)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백련결사는 초기에 요세와 교유를 맺은 친우나 지방관을 통해 유지되다가 1230~40년대에는 최우와 그에게 밀착된 중앙관료, 문인관료의 지원과 관심 속에 유지되었다. 백련결사의 지지세력이 변화한 것은 당시의 역사 상황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는 백련결사가 몽골의 침입에 대해 항전을 표방하게 되고 이에 따라 최우를 중심으로 한 강화도 정부가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에 연유한다. 요세 이후 백련사는 천인(天因)·천책(天頙)이 계승했으나, 원 간섭기인 1284년(충렬왕 10) 개경에 묘련사(妙蓮寺)가 등장함으로써 2부류로 나누어졌다. 즉 묘련사는 백련사 출신의 승려가 참여했으나,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願刹)로 등장하고 본래의 성격을 잃어 기층민과 떨어져갔다. 이에 비해 백련사는 묘련사의 등장으로 성격이 변했지만 천책의 법손인 무기(無寄)가 그 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나 무기 이후 백련사의 계승 여부는 알 수 없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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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 강진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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