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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China)

[실크로드 둔황] 막고굴(석굴) 중 장경동이 있는 북쪽편 석굴

younghwan 2010. 7. 1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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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둔황 막고굴은 둔황시가지에서 약 1시간의 거리에 있는 명사산 동쪽 끝 절벽에 세워진 석굴이다. 약 천여개의 석굴이 있어서 천불동이라고 부른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사막에 위치했던 까닭에 이 곳에 있는 벽화와 많은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서 인류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주고 있는 곳이다.

 둔황 막고굴은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사막한가운데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은 외진 곳에 있는 석굴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오랜 세월 동안 동.서 교역의 통로였던 실크로드에서 가장 큰 중심지 중의 하나이자, 중국에서 서역으로 출발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둔황 시가지에서 약 20 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사람들이 걸어서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사찰로 우리나라 산중에 위치한 사찰과 도심과의 거리에 비해서 그리 먼 곳에 세운 사찰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둔황이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이지, 인도 순례에 나서는 승려들이 거쳐 가는 곳으로 불교가 융성할 입지적인 조건은 갖추고 있는 곳이다.

 둔황 막고굴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신라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수 많은 언어로 쓰여진 고문서들이 발굴된 16굴은 막고굴 중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둔황 막고굴에서 가장 유명한 지상 10층 가까이 되는 중국 오대시대에 만들어진 석굴이 있다.


둔황 막고굴 북쪽편 출입문. 막고굴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곳에 카메라를 맏겨 놓고 가이드를 따라서 막고굴을 관람하게 되어 있다.



둔황 막고굴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수 많은 고문서들이 발굴된 '장경동'이라 불리는 제16굴이 있는 북쪽편 석굴들. 막고굴 관람은 가이드가 열쇠를 들고 다니며 일반에 개방된 막고굴을 들어가서 손전등을 비추면서 설명해 주기 때문에 실제로 어느굴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둔황 막고굴 사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며, 제일 큰 것은 10층 높이 정도 되는 것도 있고, 작은 토굴 크기인 것도 있다. 석굴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 보다는 훨씬 넓고 시원하다. 현재의 석굴 입구와 통로는 대부분 현 중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 주은래 수상 시절에 석굴의 보호와 관람의 편의성을 위해서 현재와 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는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거나 별도의 계단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둔황 막고굴 사원 중에는 외부에 벽화가 남아 있고, 목재로 만든 출입문과 처마가 남아 있는 곳도 많다.


둔황 막고굴 사원들을 보면 크고, 목조로 만든 출입문과 처마, 벽화가 남아 있는 사원은 보통 위층에 있고 아래쪽에는 규모가 작은 석굴 사원들이 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석굴은 대부분 지역 유력자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규모가 큰 석굴 사원에는 이름난 승려가 기거하면서 수행하였고 유력자들도 이들을 많이 후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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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은 4세기 중엽 전진시대에 악준이라는 승려가 처음 개굴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대까지 1천여 년 동안 각 왕조에 걸쳐 계속 뚫고 지은 것이다. 지금 남은 석굴은 550여 개이며, 소상과 벽화가 있는 굴은 474개다. 전체 석굴 안에는 4,400여 구의 소상과 약 4,500 평방 미터에 달하는 벽화가 있다. 이 벽화들을 1미터 폭으로 나열하면 무려 45km 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상이나 벽화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닌 것이 '둔황문서'다.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처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는 모두 합쳐 3만여점이나 된다. 불교 관련 내용이 중심이지만, 동서교류 관계를 전해주는 '왕오천축국전'이나 '인도제당법' 같은 진서, 마니교와 경교의 경전도 있으며, 심지어 사원의 경영 기록이나 호적, 토지문서 같은 공사 문도도 있다. 그 보물들은 근 백년동안이나 명맥을 이어 오는 '둔황학'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있다. <출처: 실크로드 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례출판>

장경동
1900년 6월 22일 둔황 석굴을 지키던 태청궁 도사 왕원록이 제16굴을 청소하다가 이상한 공명음을 듣고는 막혀 있던 밀실을 발견하였다. 길이가 2.6m, 높이 3m의 이 석굴에는 5만 점의 고문서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둔황 유물의 정수이자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제17굴(장경동)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의 유물은 4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오호십육국 시대에서 북송까지의 고문서와 고대악기, 고화, 고서 등등이었다. 변경 지역이라 잦은 이슬람 등 이교도의 침입에 파괴될까 봐 아예 중요 문화재들만 모아서 제16굴의 보조굴에 모아서 폐쇄를 했던 것이 몇 백년 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발견된 것이다. 1907년 오렐 스타인이 이곳을 관리하던 도사 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장경동에서 약 7,000점의 유물을 유출하여 대영박물관에 가져가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연구는 다시 둔황학이라고 이름 붙여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른다.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가 또 한 번 7,000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유출하게 되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에 묻어져 나간 것이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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