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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여수 흥국사, 전라좌수영을 도왔던 승병들이 수행했던 영취산 자락 조선후기 대표적인 호국사찰

younghwan 2012. 11. 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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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흥국사는 원래 고려때인 1195년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현재의 흥국사는 조선중기에 중건된 사찰로 임진왜란때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을 도와 호남지역 의병과 승병들의 항쟁에 중심이 되었던 사찰이다. 그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인조대인 1624년에 계특대사가 크게 중창한 사찰이다. 흥국사는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지금은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사찰입구에 일주문이 세워져 있지만 원래는 읍성의 성문처럼 공북루라는 누각이 있었고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500여명의 승려가 상주했을 정도로 큰 사찰로 다른 사찰에 비해서 요사채 건물이 상당히 많은 편이며, 이들을 대표하는 불전인 부처의 제자들을 모신 나한전이 있다. 흥국사는 구한말 전라좌수영이 폐지될때까지 전라좌수영과 연계한 승병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전국의 승병들과 연계한 조직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하며, 조선후기 국방강화를 위해 쌓은 산성 축성의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큰 홍예가 있는 다리는 흥국사 홍교를 비롯하여, 조계산 선암서 홍교와 벌교 홍교에서도 당시 승려들의 토목기술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승려들이 기거하면서 참천 등 수행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사찰로 조선후기 불교문화와 사회적 위치를 잘 보여주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흥국사 건물들은 대제로 인조대인 1624년에 계특대사가 크게 중창한 사찰의 모습들을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보물 396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중심으로 부처의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모신 팔상전, 사찰 중문인 법왕문, 법회를 열고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강당인 봉황루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불전은 대웅전 옆과 뒷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부처의 제자들을 모신 웅진전,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불조전, 지장보살을 모신 무사전,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쪽으로는 큰 규모의 요사채인 심검당, 적묵당, 백련사, 선방 등이 있다. 흥국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많은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보물 396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물 578호로 지정된 대웅전 후불탱와, 보물 563호로 지정된된 홍교, 보물 1566호로 지정된 무사전 불상과 복장유물, 보물 1556호로 지정된 동종 등이 있다. 흥국사가 있는 영취산은 여수반도 입구인 여수시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발 510m로 국내 최고의 진달래꽃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흥국사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가 흥하면 절도 흥한다" 는 나라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여수국가 산단 가까이에 위치한 영취산의 깊은 숲속에 보조 국사가 1195년 (고려 명종 25)에 창건한 흥국사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 팔상전 등 문화재가 배치되어 있다. 흥국사대웅전(보물 제396호)은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며, 대웅전 후불탱화는 보물 제 578호로 지정되어 있고 흥국사의 입구에 있는 홍교의 수려한자태는 보물(제563호)의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그외에도 흥국사 노사나괘불탱, 수월관음도, 십육나한도등 3점의보물이 더 있다. 흥국사는임란 때 경내에 300여명의 승병 수군이 조련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매년 4월  초순부터 한달간은 영취산이 붉은빛으로 타오른다. 흥국사 대웅전 뒤 해발 439m의 영취봉과 510m의 진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온통 진달래의 군락이 핏빛 열정으로 봉오리를 터뜨리면서 장관을 이룬다. 이 시기에 <영취산 진달래축제>가 열린다. <출처: 여수시청>  


전남 여수시 중흥동 석유화학산업단지가 있는 영취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흥국사는 조선후기에 크게 번창한 대표적인 호국사찰이다.  여수 흥국사는 여수산단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절이다. 흥국사란 말에 어울리게 지금도 국가를 흥하게 하는 여수산단을 지키고 있다. 공단 바로 근처에 있어 큰 도로까지는 달리는 트럭들로 매우 혼잡하고, 많은 화학 공단으로 뿌연 연기가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흥국사로 들어가는 길로 접어 들면 다른 세상을 보는 듯 하다. 별로 공단과는 먼 거리가 아닌데도 절에 들어서면 호젓한 느낌이 들고 뒷산이 영취산도 한번 올라가서 멀리 바다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흥국사 들어가는 길

영취사 자락에 위치한 흥국사는 여수반도 입구에 여천공단을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정유공장을 중심으로 많은 화학공장들이 자라잡고 있는 공단지역으로 주변에는 주택이나 마을이 거의 없는 황량한 지역이지만, 흥국사가 있는 영취산 계곡으로 들어서면 이곳에 공단지역이라는 사실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호젓한 숲속길과 계곡이 어울어진 곳이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이후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지원하기 위한 승병들이 기거하면서 수행하는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입구에는 성벽과 성문격인 공북루가 있었다고 하며, 당시 승려들의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규모의 홍예가 있는 보물 563호로 지정된 홍교가 있다. 최근에 세운 일주문과 승려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군을 지나 영취산 계곡길을 따라서 조금 올라가면 거북받침돌이 있는 탑비가 있고, 조그만 개울의 다리를 건너면 사찰 출입문인 천왕문을 볼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에 사찰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법회를 열거나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사찰 강당 건물이 봉황루가 있고, 그 왼쪽에 종루가 있다. 흥국사 강당은 문루형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출입문으로 사용하지 않고 강당건물로만 사용하고 있다.



여수 영취산 계곡을 건너는 다리인 보물 563호로 지정된 흥국사 홍교. 실제 사찰에는 사람의 왕래가 많지는 않고 우마차 등이 지나갈 필요가 없기때문에 짐검다리 등을 이용해서 계곡을 쉽게 건널 수 있지만, 불교에서 부처의 세계인 사찰과 속세를 분리하는 종교적인 의미로 사찰 입구에 화려함이 강조된 홍교를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 영취산은 해발 510m의 높은 산으로 진달래 군락지로 잘 알려진 산이다. 흥국사 옆으로 흐르는 이 계곡은 꽤 넓은 편으로 영취산의 규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계곡 아래쪽에는 얼마전까지 이곳에서 식당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여주는 구조물들이 남아 있다. 흥국사 계곡이 한때는 북적거리던 행락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여느 사찰처럼 일주문이 세워져 있는 흥국사 입구. 여천공단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입구에서부터 호젓한 산사의 느낌이 충만하다. 원래 입구에는 성문 문루인 공북루와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일주문 왼쪽편 언덕에 있는 승려들이 사리를 모신 부도군. 예술성이 빼어난 부도는 없지만, 이곳이 한때 500여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답게 많은 부도들이 남아 있다.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서 2~3분 정도 걸어오면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나타나고 그 안쪽에 사천왕상이 모셔진 사찰 출입문인 천왕문이 있다.


사찰 출입문 앞을 흐르는 작은 개울. 바깥세상과 부처님의 세상인 사찰을 분리해 주는 의미가 있는 개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찰 출입문인 사천왕문 바깥쪽 다리앞에 있는 흥국사 중수사적비이다. 숙종대에 세워진 비석으로 2번에 걸친 흥국사 중창불사 경위를 기록해 놓고 있는 비석으로 거북받침돌위에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거북형태를 하고 있는 받침돌은 머리가 크고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등껍질에 육각형 무늬를 새겨 놓고 있는데 무늬가 뚜렷하지 않다. 조각수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나, 흥국사 중수 내력을 기록하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비석이다.


사찰 출임문에 천왕문을 들어서 정면에 사찰 강당건물인 봉황루가 보인다.


흥국사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사찰에 비해서 크고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천왕상이다.


봉황루는 흥국사 강당 건물로 경사진 지형에 지은 누각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이다. 다른 사찰의 경우는 출입문이 있는 문루 형태로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서 흥국사 봉황루는 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로 출입문을 두고 있지 않다. 흥국사를 들어오는 길인 영취산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방향을 문을 달아서 경치를 감상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꽤 큰 규모의 강당건물로 한때 승려 500여명이 기거했던 흥국사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주불전인 대웅전 경내 사이에는 중문이 법왕문을 두고 있어서 대웅전과는 분리되어 있는 느낌을 주고 있어,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와 거리가 먼 유생들이었던 지방 관료들이 승병들이 머물던 사찰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승려들과 만날 수 있도록 고려한 것으로도 보인다.


대웅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가는 중문이라 할 수 있는 법왕문. 보통 사찰에서는 중문을 두는 경우 금강문을 앞쪽에, 천왕문을 안쪽에 두거나, 안쪽에 불이문을 두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흥국사에서는 법왕문을 두고 있다. 법왕문 내에는 천왕문처럼 특별히 모셔진 대상이 없이 출입문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불전인 대웅전(보물 396호)

흥국사 대웅전은 보물 39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조선후기에 크게 중건된 불전이다. 임진왜란때 승병들의 활약으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많은 사찰들이 크게 중건되었는데 흥국사는 전라좌수영을 도와 남해안에서 왜군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남해안을 대표하는 호국사찰이 될 수 있다. 대웅전은 이런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인조대에 계특대사가 크게 중건할 때 지은 건물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보물 1550호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 삼존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뒷편으로는 17세기 불교 미술의 대표작이라고 평가받는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흥국사 주불전인 대웅전.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고 지어진 건물로 다포계 공포와 단청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 양쪽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는 투박하면서도 해학적인 모습의 석수가 세워져 있다.


대웅전 앞 거북이 등에 올라 있는 형상의 석등.  법당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극락정토를 향해 타고 가는 배(반야용선)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보물 1550호로 지정된 석가여래 삼존불상이 닫집에 모셔져 있으며, 그 뒷편으로는 조선후기 불교미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영산회상도를 그린 보물 578호로 지정된 후불탱화가 있다.


흥국사의 불전들

흥국사에는 주불전을 중심으로 그 뒷편에는 인조대에 대웅전을 중건할 때 원래 있던 대웅전 건물의 부재들을 활용하여 지은 팔상전을 비롯하여 한때 500여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답게 승려들을 상징하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웅진전,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모셨던 조사당이라고 할 수 있는 불조전, 전란을 통해 죽은 승려들이나 신도들을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지장보살을 모신 무사전과 남해안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관음보살을 보신 원통전이 있다. 흥국사는 승병들이 기거하던 사찰로 다른 사찰에 비해서 불전이 많은 편이며, 호국사찰과 남해안이라는 지역적 특징을 보여주는 불전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불전인 흥국사 대웅전 뒷편 언덕에 위치한 팔상전. 팔상탱화를 모신 팔상전은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한 법회를 중시하는 사찰에 많이 두고 있는 불전이다. 앞면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현재의 대웅전을 중건할 때 원래 대웅전의 건축자재를 이용해서 지은 건물로 다른 사찰의 팔상전에 비해서 건물의 규모가 큰 편이며 이전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건물이라 한다.


팔상전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


팔상전 왼쪽편에 위치한 웅진전. 웅진전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모신 불전으로 보통 나한전이라고 부른다. 사찰에서 나한전을 두고 있는 경우는 수행중심의 사찰로 많은 승려들이 머무는 경우에 이들 승려들의 미래 모습을 모여주는 의미로 부처의 제자들을 모신 불전인 나한전을 두고 있다.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국조전. 보통 조사당 또는 조사전이라고 부르는데 이 또한 승려들이 많고 오랜 내력을 가진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불전이다. 아마도 사찰의 규모가 크다보니 뛰어난 승려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 대웅전 옆쪽에 위치한 무사전. 지장보살을 모시는 불전으로 보통 지장전 또는 명부전이라 부른다. 지장전은 죽은이의 명복을 비는 불전으로 최근에 사찰에서 새로 새워지는 불전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오래된 불전이라 다른 사찰의 지장전이나 명부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물은 작은 편이다. 이 절이 크게 중건되고 호국사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 임진왜란 당시의 죽은 많은 승려들이나 신도들을 위로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불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사전에 모셔진 목조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은 보물 156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17세기 불상의 양식을 잘 반여하고 있는 불상으로, 복장유물에 조성주체와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발원문이 있다.


흥국사의 요사채

흥국사는 한때 500여명 이상의 승려들이 머물던 사찰로 여수에 있던 전라좌수영을 돕기 위한 승병 역할을 부여 받았던 사찰로 국방을 위한 조직체계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흥국사에는 많은 승려들을 수용하기 위한 여러동의 요사채 건물들을 두고 있는데 건물의 규모 또한 다른 사찰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이다. 요사채 건물로는 대웅전 경내 좌.우에 앞면 6칸 규모의 심검당, 4칸 규모의 적묵당과 그 뒷편의 백련사, 수행공간이 선방이 원래 있었고, 그 앞쪽에 최근에 지은 2층 요사채 건물이 선불장 등이 있다. 보통 일반적인 사찰의 요사채는 낮은 지붕에 일반적인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반해서 흥국사 요사채는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불전처럼 크고 웅장한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많은 승려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심검당은 1812년 중수한 건물로  앞면 6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적묵당도 앞면 4칸,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건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적묵당 앞 승려나 신도들이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툇마루. 요사채 건물임에도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으며, 익공계 공포에는 용머리로 장식을 하고 있다.


옆쪽에서 본 적묵당


적묵당 뒷편에는 별도의 마당이 있는 요사채 건물인 백련사가 있다. 


백련사도 앞면 3칸, 옆면 3칸의 큰 건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양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로 흥국사를 찾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보인다.(?)


백련사 뒷편으로는 일반적인 사찰의 선방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한옥형태의 선방이 있다.


최근에 지어진 2층 건물로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인 선불당.


사찰 경내 앞쪽에 있는 범종루.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큰 편이다. 범종과 법고, 목어로 구성되어 있다.


법고와 목어


흥국사 경내


흥국사 뒷편 원통전으로 올라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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