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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에서 천문학은 국왕의 권위와 대외관계에 관련된 정치와 외교에서 아주 중요한 학문이었다. 그래서 서양의 천문학에 비해서도 상당히 발달되었던 학문의 한 분야였다. 천문학은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에 따른 별자리의 이동을 기본적으로 하고, 천문학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였던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예측, 하늘의 뜻을 살피는 중요한 행사였던 일식과 월식의 예측 등의 천문학 연구가 국가 통치에서 국왕과 나라의 권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는 한나라 안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인 위상을 강화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전기 세종때에는 조선을 건국한지 얼마되지 않았기때문 국가의 위상을 정립하고, 국왕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다양한 형태의 천문학 연구가 활발히 일어났으며, 다양한 형태의 천문관측 기구가 만들어졌다. 당시에 시간을 정하는 물시계와 모든 천문학을 기초로하여 만드는 역법 등이 대외관계와 국왕의 권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행위였다. 조선의 천문학은 전담기구인 관상감을 중심으로 천문현상을 정밀하게 관측하고 이를 기록에 남겨 놓고 있는데, 행성의 폭발, 일식, 혜성의 출현 등에 대한 기록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정밀한 관측기록의 결과이다.


별자리지도(천상열차분야지도, 국보 228호). 국가의 위상과 관련하여 천문학의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물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이는 중국의 천문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본 별자리를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송시대의 순우천문도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이 천문도는 고구려 천문각석도를 기록한 천문도를 참조하여, 당시의 별자리를 세밀하게 검증하여 만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천문도에는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대부분의 별인 1,464개의 별이 기록되어 있는 상당히 수준 높은 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뒷면. 다른 형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인식하기는 좀 힘들다.


고구려의 천문지식을 기초로 하여 1396년(태조4)에 완성된 것으로 중국 남송 때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하늘의 형상을 십이차와 분야에 따라 그려 놓은 것'이란 뜻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돌의 뒷면에는 배치만 다른 천문도가 거꾸로 새겨져 있다. 한번에 새겨진 글자 수는 2,932자이며 별의 수도 1,464개에 이른다. 천문도에 새겨진 권근의 글에 의하면 고구려의 각석천문도가 전란 중에 대동강에 빠졌는데 태조 때 종이로 된 고구려 천문도를 찾아 새롭게 고쳐 천문도를 새겼다고 한다. <출처:고궁박물관>


이 천문도는 그냥 돌에 점을 새겨놓은 것 같아 천문학적 지식이 없으면 잘 알아보기 힘들다.

직육면체의 돌에 천체의 형상을 새겨 놓은 것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권근, 유방택 등 11명의 천문학자들에게 명을 내려 만들도록 한 것이다. 고구려의 천문도를 표본으로 삼아 그 오차를 고쳐 완성하였는데, 두 부분으로 나누어 내용을 배치하고 있다. 윗부분에는 짧은 설명과 함께 별자리그림이 새겨져 있고, 아래부분에는 천문도의 이름, 작성 배경과 과정, 만든 사람의 이름 및 만든 때가 적혀 있다. 별자리그림에는 중심에 북극을 두고 태양이 지나는 길인 황도(黃道)와 남북극 가운데로 적도(赤道)를 나타내었다. 또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이 총망라되어,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4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 해, 달, 5행성(수성, 금성, 토성, 화성, 목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에 따라 절기를 구분할 수도 있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된 이 석각천문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지금은 표면이 심하게 깎여나가서 알아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고구려 천문도의 원형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출처:문화재청>


목판본 천상분야열차지도. 돌에 새긴 것과 같은 내용으로 보인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윗면. 기준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생각된다.???


황도 부근의 하늘을 12등분한 후 1,464개의 별들을 점으로 표시한 지도.


아랫부분에 적힌 글씨


우리나라의 별자리 지도


선기옥형(조선후기).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역할을 하였던 기구로 혼천의라고도 한다.


창경궁에 있는 창경궁 관천대이다. 하늘의 천체를 관측하는 곳으로 천문을 관측하는 관청인 관상감과 국왕이 직접 관측하는 창경궁 두 곳의 관천대가 남아 있다. 관천대 위에 간의나 혼천의 또는 적도의를 올려놓고 천문을 관측했다고 있다.


현대 계동 사옥 앞에 있는 관상감 관천대


관천대 위에 올려놓고 천체를 관측하던 적도의.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천문관측기구는 실물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 능인 영릉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천문 관측기기의 모형들이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을 체험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천문분야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의 (19세기, 복제품). 서양식 세계지도를 구면에 그려 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지구의이다.


남.북반구 별자리판. 절기와 계절을 측정했던 천문관측기구로, 원판 가운데의 지평판을 회전시켜 매일 보이는 하늘의 영역을 표시할 수 있다.


천세력(조선후기). 1782년(정조6)에 관상감에서 기초하여 편찬한 역서로 1777년(정조1)부터 1886년(고종23)에 이르는 110년간의 역曆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천문관측을 전담 관청인 관상감까지 만들어 지속적이고 세밀하게 한 것은 농사의 기본이 되는 절기를 맞추고, 국가의 시간을 통일하는 통치행위로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며, 그 활동의 결과로 달력인 역법이 만들어진다.


영관상감사인. 관상감은 천문, 지리, 역법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상감의 영사가 사용하던 관인이다. 영사는 별부이며 영의정이 겸직하였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천문관측과 역법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천문학의 발달
전통적으로 천문학은 정치와 연결되어 제왕의 학문으로 발달하였다.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의 변화 등을 살펴 시각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농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조선의 왕들은 천문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통치에 활용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서운관을 두어 지속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하게 했다. 서운관의 관리들은 밤낮으로 정밀하게 천문현상을 관측하여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서운관은 세종 때에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천문관측기구들이 연구.개발되고 궁중과 도성 및 지방에 설치되어 생활과 통치에 활용되었다. 주요 천문 관련 기기로는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대간의.소간의, 천체의 위치와 적도 좌표를 관측하는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구, 주야겸용의 천체관측기인 일성정시의, 그 외 여러 종류의 해시계가 있었다. 이렇게 얻어진 천문학적 지식의 주요 부분은 천문도로 집대성되었다. 조선의 천문학은 천체 및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과 천문도 제작, 천문 관련 서적의 발간 등이 활발했던 세종조에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측우대 (보물844호).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가뭄이 극심하자 정조임금이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임금 때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 창덕궁에 두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네 측면에 새겨져 있다.


측우기는 보물 561호 금영측우기를 복원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 조선 기상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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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효자동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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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걸어서 하늘까지 2010.11.07 18: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선의 천문학이 수준이 참 높았네요.
    이런 과학정신의 뿌리가 지속적으로 성정하지 못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ㅠㅠ

    • younghwan 2010.11.07 19: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과학사 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천문학은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하며, 실록 등에 많은 천문관측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