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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후기 경제와 산업

younghwan 2010. 12. 2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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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조세를 부과하고 징수하는 조제제도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민간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각지방이 특산물을 정부에 납부하던 공물을 대동미라는 명목으로 쌀로 납부하게 하는 대동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동법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처음으로 경기지역부터 적용했다고 숙종때 전국적으로 시행했다고 한다. 전국적 시행에 100년 이상이 걸린 엄청나 지방토호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있었던 제도이다.

 지금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현상이지만, 조선의 관료제도나 사회제도의 모순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국가로부터 녹봉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 집안을 운영하는 경제력의 기반으로는 부족했다고 한다. 실제 관료나 양반들의 수입은 지방관들이 주는 뇌물성격의 선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일부 탐관오리만 행했던 치부의 수단이 아니라 당대의 유학자나 존경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 또한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방관들이 이런 선물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수단이 방납이라는 제도인데, 지방관이 쌀을 받고 특산품은 시장에서 구해서 중앙정부에 바치는 구조인데, 그 시행단계에서 많은 폭리를 취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았다고 한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크게 바뀐 현상이 국가는 필요한 물품을 상인을 통해서 구매함으로써 상업이 전시대에 비해서 크게 발전했고, 여러가지로 경제적인 순작용이 많았던 제도였다고 한다.


대동법 시행을 기념한 비석의 탁본, 대동법시행기념비 탁본. 평택시에는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 대동법의 유래와 시행의 어려움 등 당시 사회환경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준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대동법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이래 효종 2년(1651) 김육의 주도 하에 충청도에서 시행되었고,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비문은 김육에 대한 기념비인 동시에 대동법이 시행되기까지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대동법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대동미라는 명목으로 1결에 쌀 12두씩 징수하도록 한 것으로 옷감이나 돈으로 대신 납부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즉위년 이원익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서 대동법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이후 효종 대에 김육의 주도로 충청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숙종 3년(1677)에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농민들의 경제적인 부담은 가벼워지게 되었고,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상도 단성현 고을의 인구조사 장부인 경상도 단성현 호적대장이다. 조선시대 신분제에서 기본이 되는 자료로서 그 제도는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조선후기 경상도 단성현 (현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살았던 사람들을 3년마다 조사하여 수록한 인구 조사 장부이다. 호적대장에는 대체로 호 구성원의 직역, 이름, 나이, 본관, 사조의 직역과 이름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노비가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삶을 살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유학자 정경세와 임진란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박진영의 호패. 호패에는 소지자의 생년월일과 과거에 급제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나무로 만든 저울대


돌로 만든 저울추

물건의 무게를 재는 데 사용한 나무 저울대이다. 저울대에는 '천평'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돌로 만들어진 저울추에는 앞뒤에 '이로써 오래도록 경중을 알 수 있다'는 뜻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네 면에 각각 다른 척도를 새긴 놋쇠 자

역대 중국에서 사용한 4개의 척을 사각에 새겨 넣은 자이다. 건륭6년(1741) 청나라에서 제작된 영조척, 송나라에서 제작된 포백척, 건초 8년(83) 후한에서 제작된 건초척, <주례>에 규정된 주척이 각각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세금을 걷는 관리의 신분증, 수세패

평시서라는 관청은 한성부 종로에 있는 큰 가게(시전)를 관리하고 각종 물가에 관한 일 등을 담당하였는데 세금을 거둘 때 수세패를 착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수세패는 한성부에 있는 족두리전에서 관할 점포로부터 세금을 거두며 착용했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에 널리 유통된 화폐, 상평통보

조선후기에 가장 널리 유통된 화폐이다. 숙종 4년(1678)에 처음 발행된 상평통보는 '언제나 고르다'는 상시평준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통 가치에 등가를 유지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앞면에는 '상평통보'라는 글자가,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을 줄여 쓴 명칭, 천자문 중 한 글자, 숫자나 부호 등이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동전을 보관한 상자


조선의 대표 화폐, 상평통보

상평통보는 조선후기에 전국에 걸쳐 널리 사용된 동전이다. 만들어진 시기와 장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기와 재질 등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값으로 쳤다. 앞면에는 '상평통보'라는 무자를 새겼고, 뒷면에는 만든 관청과 주조 번호를 새겨 넣었다. 엽전 한 닢은 한푼이고, 110푼이 1전, 10전이 한냥이다. 상평통보 가운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발행한 화폐가 '당백전'이다. 당백전을 줄여서 당전이라고 하였는데, '땡전 한 닢 없다'는 말에 쓰인 땡전은 당전에서 비롯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상업과 상인
조선후기에 상업이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서울의 여러 곳에 큰 시장들이 들어섰고, 지방에서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이 상설시장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보부상을 상대로 하는 도매상인으로서 객주와 그 활동공간인 여각이 등장하였다. 한편 화폐의 사용은 인조 대 이후 몇 차례 시도되다가 숙종 4년(1678) 처음 주조된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확대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가난한 사람이 스스로를 노비로 판 문서, 노비자매문서

가난한 사람이 살아 남기 위해 자신을 노비로 파는 문서이다. 32세의 복쇠라는 남성이 아내와 함께 자신의 몸을 25냥에 파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제적인 위기에 처한 가난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자신을 노비로 팔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농촌생활을 경영하는 지혜를 적은책, 증보산림경제.

조선 영조 떄 유중림이라는 사람이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를 보충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산림에 묻혀 살면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과 농촌생활의 지혜를 기록하고 있는데, 농사짓는 법을 비롯하여 나무심기, 가축 기르기, 건강관리, 질병예방법 등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타작과 자리짜기, 김홍도 필 풍속화첩(보물527호)

농업과 농민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세상 일 가운데 으뜸이라 여겨 나라에서 가장 중요시하였다. 농민들은 절기마다 필요한 농사일에 힘썼고, 나라는 절기에 따른 농사정보를 수집하여 농서를 편찬하였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이앙법 같은 농업기술이 개발되고 고구마.감자 같은 대용식물이 도입되었다. 여성들은 농사 외에 길쌈을 하여 가족의 옷감을 만들고 국가에 내는 군포를 충당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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