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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병자호란과 그후, 붕당정치와 새로운 질서의 모색

younghwan 2010. 12. 2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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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중기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각국에는 크나큰 변화가 발생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중앙집권적인 동경중심의 막부정치가 시작되었고, 북방에서는 만주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여 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허약함을 드러낸 국왕과 집권층에서는 중립외교를 추구한 광해군을 축출하고 명분론적이며 친명을 표방한 서인세력이 집권했다. 인조대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에 허망하게 굴복하고, 명나라 또한 농민혁명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 정립되었다.

 병자호란은 한반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허무하게 북방민족에게 굴복한 사례라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병자호란을 상징하는 유적이나 유물이 남한산성이나 강화도를 제외하고는 별로 찾아 보기 힘든 형편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중앙박물관조차도 병자호란과 관계된 유물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쓴 병자호란을 겪은 일기와 삼학사 중 한명인 윤집의 초상화만이 있다. 병자호란 이후 사회를 대표한 복고적인 현상이었던 예송논쟁과 붕당정치를 이끌었던 남인의 대표 허목과 서인의 대표 송시열의 초상화와 문집을 볼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저항한 윤집의 초상화. 병조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한 삼학사 중 한명으로, 홍익한.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에서 순절한 윤집의 초상화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세 학사의 전기, 삼학사전. 송시열이 쓴 글이라고 한다.

현종 12년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이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순절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로, 이들은 조선후기 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쓴 일기

북방에서 성장한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명을 압박하는 한편, 인조 14년(1636)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병자호란 후 척화론자의 대표로서 청에 인질로 갔다가 순절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삼학사'라 하여 조선후기 내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7세기 호란 이후 공감을 얻은 북벌론은 중화문명의 정통성을 조선이 계승하였다는 자존 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내실을 다져나가는 쪽으로 발전하였다. 18세기 이후 청이 중국문화의 계승자로서 위치를 굳혀감에 따라 조선에서도 점차 청을 인정하고 그 문화를 수용하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남인의 지도자 허목의 초상.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허목의 초상화이다. 허목은 오랫동안 재야의 학자로 있으면서 깊이 있는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이후 현종 대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남인의 지도자로서 서인과 예송논쟁에 참여하였다. 허목은 왕의 예가 사대부와 다르다는 예론을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허목의 글을 모은책, 미수기연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문신인 미수 허목의 문집이다. 이 문집에서 허목은 효종의 상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일년 동안 입는 상복인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서인의 주장은 효종을 둘째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이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 붕당정치를 이끈 서인의 지도자 송시열의 초상

조선중기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인 송시열의 초상화이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서 효종이 죽은 뒤에 일어난 예송논쟁에서 남인과 대립하였고 천하에 적용되는 에가 동일하다는 예론을 옹호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송시열의 글을 모은 책, 우암선생 문집

조선중기 대표적 학자이자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의 문집이다. 이 문집에는 효종 대에 시급하게 해야 할 일과 유교적 정치이상을 담은 <기축봉사>와 <정유봉사>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송시열의 북벌론이 담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붕당정치
선조 대 이후 성리학적 가치관을 지닌 사림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 세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생겨났다.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많았다. 이후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 따라 붕당이 세분되었는데,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는 서인이 대표저인 집권세력이 되었다.

새로운 질서의 모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 조선 사회는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은 대동법의 시행, 호적제도의 정비, 상평통보의 유통 같은 개혁을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 시기에는 건국 이래 발전해 온 예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래서 국왕의 상례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정치 세력간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상업이 발전하는 등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문서나 그림, 각종 생활용품을 통해 당시 사회상의 변화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구가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예설을 정리한 책, 오선생예설분류

정구가 중국 송나라 다섯 학자들의 예에 대한 의견을 모아 엮은 책이다. 이책은 단순히 예에 대한 내용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교를 중심으로 한 모든 법질서에 관한 것들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김장생이 제자들과 예에 관해 문답한 책, 의례문해

김장생의 예론을 그의 아들 김집이 모아 편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상례.제례를 비롯하여 관례.혼례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여러 가지 변칙적인 사례에 대한 예에 관한 문답을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상의 신위를 보관하는 장.

예학
양반 관료들은 각종 예의 정리를 통해 유교적인 가치를 사회에 정착시키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흐트러진 향촌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가와 양반 관료들은 예학을 강조하였다. 특히 김장생은 <가례집람>을 비롯한 각종 의례서를 지어 예학을 학문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에게 계승되었으며, 이후 하나의 학문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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