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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의 대외교류와 임진왜란

younghwan 2010. 12. 2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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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동아시아는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북방의 몽골과 여진, 한반도의 조선 그리고 일본이 존재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안정적인 국제 질서 속에는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기본으로 교류를 하였고,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괴롭혀 왔던 일본은 조선이 대마도 정벌 등의 강격책과 삼포개항 같은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혼란기인 전국시대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통일하고 한반도를 침범함에 따라 동북아 질서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으며, 조선과 명나라는 상당한 국력을 소비하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경향이 발생했으며,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청나라가 등장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당시 조선의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수량이 많지는 않으면서 내용면에서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 사신의 사행길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선통신사 그림 등과 임진왜란 유물로 서애 류성룡의 갑옷과 투구,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유물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영인본이 전시되어 있다.



명나라로 가는 바닷길, 발해조천도. 명.청교체기 어려웠던 중국의 사정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뱃길을 이용한 사신왕래는 처음 있는 것이라 다음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인조 2년(1624) 인조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명에 파견된 이덕형 일행이 바닷길을 통해 다녀온 행로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끝부분에는 이후 바닷길을 이용하여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참고하도록 만들었다는 이덕형의 글이 있다. 명.청 교체기에 바닷길을 통한 대명교류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나라 사신이 조선이 행사 풍속을 그린 그림, 아극돈봉사도.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본 조선의 모습을 그린 화첩이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조선의 이미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영조1년(1725) 청나라 사신 아극돈이 4차례 조선에 다녀가면서 각종 행사 및 풍속, 풍경을 그린 화첩이다. 화공 정여가 주로 맡아 그렸으며 조선 화원도 일부 참여하였다. 매폭에 동유집에 수록되었던 28수의 시를 옮겨 놓았다. 조선 후기의 역사, 문화, 민속 연구에 중요한 시각자료일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조선 간의 문화 교류 및 정치 외교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남쪽나라 유구국 지동, 유구국도. 유구국은 지금의 오키나와 제도에 있었던 나라로 당시의 오키나와에 대한 지식을 보여준다.

조선후기 민간에서 유행한 <여지도>에 실려 있는 유구국 지도이다. 유구국은 지금의 오키나와에 있던 나라로 중종 대까지 조선에 사신을 보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17세기 이후 직접적인 교류는 쇠퇴하였다. 지도의 상.하단에는 이수광고 허봉이 유구에 대해 쓴 글이 실려 있다. 이들은 중국 사행을 통해 유구에 대한 정보를 접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과 교류한 나라
조선과 명나라는 건국 초 여진 문제와 요동지역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명으로부터 형식적인 책봉을 받고 조공무역을 하는 형태로 관계가 정착되었다. 명으로 파견된 사신이나 명의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는 대부분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임명되어, 명의 지식인들과 문화.학술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주변국인 여진과 유구 등과는 교린정책을 기본으로 교류하였는데, 여진에게는 세종 대 4군 6진을 개척하여 강경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류큐와는 전 시기에 걸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중종 대 이후로는 직접적인 통교가 단절되었고 중국 베이징에서 표류민의 송환 등이 간접적으로 처리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임진왜란 해전을 그린 그림.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 쓴 일기, 이충무공 난중일기

임진왜란 (1592~1596) 때에 이순신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현충사에 7권이 남아 있다. 이 일기는 <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수군 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전황 및 당시 군사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가칙 높다. 전시된 책은 <난중일기> 초본을 1969년에 축소 영인한 것이다.

<난중일기> 중에서
임진년 6월5일
아침에 출발하여 고성 당황포에 이르니, 왜선 한 척이 크가가 판옥선 같았는데, 배 위에 누각이 높았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 있었다. 중간 배가 12척이고 작은 배가 20척이었다. 한꺼번에 쳐서 깨트리려고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왜장 7명의 머리를 베었고 나마지 왜병들은 육지로 내려가 달아났지만, 나머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출처:중앙박물관>


류성룡의 투구와 갑옷, 류성룡 갑주 (보물460호)


투구

류성룡은 임지왜란 때 재상으로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였던 문신 겸 학자이다. 류성룡은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을 관군으로 편입하여 조선군의 전투력을 높였다. 류성룡의 종가에는 그가 직접 사용하던 유물이 전해지는데. 이 갑옷고 투구는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임진왜란
선조 25년(1592)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에는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조선군이 밀렸으나,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승리와 각 지방 사림의 의병 활동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이순신의 활약은 임진왜란의 전황을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의 3대 승리로는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으 행주대첩, 김시민으 진주대첩을 꼽을 수 있다. 국제전으로 진행된 임진왜란은 1598년 일본이 물러나며 끝났지만, 조선.일본.명나라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에도성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 통신사입강호성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그림은 여러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도의 집권세력인 막부는 통신사접대에 많은 비용을 소모하게 하여 지방 다이묘(대명)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통신사를 활용하였다. 구한말에 일본에서 집권세력으로 등장했던 인물들은 주로 통신사 접대를 많이 했던 큐슈지역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조선통신사에 대해서 반감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조 14년(1636) 통신사 일행이 에도 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행렬도이다. 사행의 목적은 일본의 태평함을 축하한다는 명분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사는 임광, 부사는 김세렴으로 총 인원은 475명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일본에 간 통신사

임진왜란 후 조선은 선조 40년(1607) 포로의 송환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고 광해군 1년(1609)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불안정한 대청 관계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고, 일본의 바쿠후는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는 것을 장군의 권위를 과시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조선후기 통신사는 유학.문학.의학.미술 등 조선과 일본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는 통로이자 외교사행이었다.

조선은 명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명, 일본, 여진, 유구 등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명과는 조공책봉관계를 기본으로 교류하며 왕권과 국가의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병자호란(1636) 이후 조선은 청과 조봉책봉관계를 맺었으나 17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8세기 이후 청이 중국 문화의 계승자로 위치를 굳혀감에 따라 조선에서도 점차 청을 인정하고 그 문화를 수용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의 대일정책은 대마도 정벌(1419)과 같은 강경책과 삼포개항(1426)과 같은 회유책을 함꼐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나, 일본의 요구와 더불어 명.청이 교체되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국교를 재개하였다. 조선후기 조일관계는 일본이 60여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고 조선이 12차례 통신사를 파견하는 등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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