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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전기 성리학과 사림정치

younghwan 2010. 12. 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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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 성종대부터 신진관료 세력으로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연산군대와 중종, 명종대에 걸쳐서 여러번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선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이끌었다. 중종대 조광조가 성리학을 조선에 맞게 변형시키고 이를 현실정지에 적용하는 도학정치를 주장했다. 조광조 이후에 이황.조식.이이와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계승하여 성리학을 현실정치에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으며, 다향한 학파가 형성되면서 조선후기 붕당정치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중기 사림정치를 이끈 조광조선생의 문집, 이황 선생의 성학십도, 이이 선생의 성학집요를 전시하고 있어서 조선을 이끈 대표적인 학자이자 사상가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들이 어린시절 배웠던 주요 교재들인 천자문, 소학 등의 교재와 경서통, 회초리 등의 교자재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이들의 공부한 결과로 얻을 수 있었던 관료로서의 길을 열어 주었던 과거합격증과 합격자 명단 등 당시 양반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도 함께 볼 수 있다.


조광조의 글을 모은책인 정암선행문집. 조선 중종때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하다 훈구세력의 공격을 받았던 조광조 선생의 대표적인 글들을 모은 책이다.

중종 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조광조의 시문집이다. 조광조는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며 현량과 실시, 위훈삭제 등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 책에는 중종 13년(1518) 홍문관 부제학 재임 시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한 상소문 등 조광조의 대표적인 글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성리학의 핵심 원리를 그린 그림인 성학십도. 이황선생이 성리학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만든 그림이라고 하는데 성리학이라는 학문자체가 워낙 어려운 학문이라 그림을 봐도 무슨뜻인지 이해하기는 쉽지않다.

조선중기의 학자 이황이 선조1년(1568) 왕이 이해하기 쉽도록 성학의 개요를 10개의 도설로 그린 그림이다. 이황은 그 중 천명을 다루는 <태극도>와 인간의 심성을 다루는 <심통성정도>를 성학의 핵심으로 보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의 학문에 대해 쓴 책인 성학집요. 이이선생은 오늘날까지도 찾아보기 힘든 천재로 당시에 시행했던 모든 과거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이책또한 옛책을 옮긴것이 아니로 중요한 내용을 본인이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의 학자 이이가 선조 8년(1575) 왕이 알아야할 성리학의 가르침과 여러 학설, 즉 성학의 핵심을 보기 쉽게 뽑아 엮은 책이다. 이이는 이 책에서 왕은 인격을 수양하여 좋은 신하를 등용하고 이들에게 국정을 위임함으로써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정극인이 지은 향약에 관한 시인 불우헌집. 향약은 조광조가 주창한 성리학을 향촌생활에 접목하는 것인데, 그 취지는 좋았으나, 실제로는 지방의 토호세력들의 계모임과 같은 성격으로 변질된 면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후기에는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소작인을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향약에서 볼 수 있듯이 좋은 취지라 할지라도 그 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황이 쓴 향약의 서문, 이황 필 향입약조서

명종 11년(1556) 이황이 안동 예안에서 시행하기 위하여 중국의 <여씨향약>을 본 떠 만든 향약인 <예안향약>의 서문이다. <예안향약>은 향약의 4대 덕목 중 과실상규를 특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영남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남계서원 모형. 중앙박물관에는 조식선생을 모신 남계서원 모형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서원 또한 향약과 마찬가지로 선현의 제사를 모시고 후학을 가르친다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후대에서는 지방토호세력들이 지방관리의 정책을 억압하고, 붕당을 형성하고, 공교육인 향교를 무력화시키는 등 많은 폐해를 발생시켰다. 구한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여론에 먹혀서 가능했던 이유도 당시 서원세력들이 민심을 많이 잃어서 그런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리학과 사림정치
16세기 성리학 이론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서경덕.이황.조식.이이와 같은 탁월한 학자들이 등장하여 학파를 형성하였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림은 중종대 조광조가 주장한 도학정치를 계승.발전시켜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와 같이 성학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성학이란 성인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국왕도 성리학을 공부하여 정치에 실현해야 한다는 배경에서 강조되었다. 이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군신공치의 이념을 추구하는 사림정치의 이론 기반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어린이용 한자 교과서인 천자문. 명필 한석봉이 글씨를 쓴 천자문의 글씨체는 오늘날도 한자를 배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의식중으로 따라서 쓰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력이 아주 컸다고 할 수 있다. 한글 주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선조때에도 한글의 영향력이 생활전반에 미쳐있음을 알 수 있다.

한문을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해 교과서로 쓰이던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조 16년(1583) 명필인 석봉 한호가 중국 양나라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을 해서로 쓴 것이 처음 간행되었다. 한글로 훈과 음이 달려 있는 이 책은 처음 간행된 이래 왕실.관아.사찰.개인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어 초학자의 한자.글씨 학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유교 경전의 구절을 써 넣은 대쪽. 경서통


성리학 입문서, 소학

선비가 되는 첫 단계인 수기를 강조하는 성리학의 입문서로 주희의 제자 유자징이 편찬하였다. 소학은 조광조, 김안국 등 기묘사람이 특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김안국은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소학>과 비슷한 단계의 수신서로는 <동몽선습>,<격몽요결> 등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학습지도용 회초리, 교편


시경을 풀이한 해설책인 시전대전. 당시 과거시험을 공부하던 선비들을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책자이다.

시경을 중국 고대의 시를 모은 책으로, 오경 중의 하나이다. 사서오경은 과거 공부의 핵심교재였다. 이 책에는 밑줄을 긋고 방점을 찍으며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어 옛 선비들의 공부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책을 보관하는 상자인 책함


흰종이에 쓴 소과 시험 합격증인 백패 (보물725호)

중종 2년(1507) 유학(벼슬하지 않은 유생) 양공준이 생원시험 3등급 59번째로 합격하였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소과인 생원, 진사 시험을 통과하면 백패로 불리는 합격증서와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최종 합격자 수는 생원, 진사 각 100명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붉은 종이에 쓴 대과시험 합격증, 홍패 (보물725호). 과거합격증인 홍패는 가문의 영광과 같은 존재라서 그런지 전국적으로 주요 가문들에는 이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종 15년(1520) 성균관 생원 양공준이 문과 시험의 병과 8번째 급제자임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문과, 무과 시험을 대과라고 하는데, 여기에 합격해야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대과 합격자는 홍패로 불리는 합격증서를 받고 여러날에 걸쳐 축하 행사에 참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과거 시험 합격자명단, 정덕계유문무잡과병목 (보물603호)

중종 8년(1513)에 실시한 문무잡과 시험에 합격한 합격자의 명단이다. 조선전기 방목은 희귀한데 특히 세 개과의 합동 방목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조선전기 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합격자는 갑.을.병과 등수대로 등재되었으며, 본인의 성명과 함께 본관.거주지.처.부모 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선비의 공부법
선비는 먼저 서당에서 <천자문> 등으로 기본적인 학문의 소양을 익히고 향교나 서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이상적 인간형인 선비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수기의 첫단계는 <소학>에서 시작하였다. 이와 비슷한 단계의 교재로는 <동몽선습>,<격몽요결> 등이 있으며, 특히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은 <소학>을 조선에 맞게 지은 수신 교과서였다. 다음 단계로는 사서와 오경을 읽고, 그 사이에 <근사록>같은 성리서와 <사기>와 같은 역사서로 식견을 넓혔다. 여가에는 거문고 타기, 활 쏘기, 투호 같은 것을 즐기되 때와 법도에 맞게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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