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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전기 양반 사회 생활모습

younghwan 2010. 12. 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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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 양반사회의 모습은 선비들이 태어나서 공부를 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를 하고, 관직에 입문해서 관직생을 하다가 낙향해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당시에 양반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물과 유적 또한 그들이 읽었던 서적들, 과거시험에 합격했음을 알려주는 홍패.백패, 관직 임명장인 교지, 그들이 정책에 대한 글을 올린 상소문, 일생을 정리하면서 정리한 각종 일기와 문집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런 유물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양반의 일생에 관련된 문서 이외에도 당시 사회모습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 자녀들 사이에 유산상속을 정리한 분재기, 관가에 등록한 호적, 지방사회를 교화시키고자 만든 향약, 계모임을 묘사한 그림 등이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많은 유물들 중 율곡 이이선생 남매의 분재기를 전시함으로써 당시 재산분배에 남녀차별이나 장자우대가 없었음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또한 당시 선비들이 사용했던 문방구와 문집, 한석봉의 글씨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이의 남매들이 재산을 나누며 작성한 문서, 이이남매 분재기(보물477호). 조선전기 재산분배에 있어서 남녀구분과 장자우대의 원칙이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문서이다. 제사 또한 장자만 지내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지냈다고 한다. 분재기의 주요 내용은 제사를 어떻게 지낼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이가 31세 되던 명종 21년(1566) 이이의 남매들이 모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눈 문서이다. 분재기의 첫머리에는 재산분배의 원칙, 제사 비용과 장소에 대한 합의를 기록하고 남녀 구분 없이 나이순으로 받을 재산을 기재하였다. 조선전기의 아들 딸 구분 없는 재산상속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분재기의 주요 내용은 제사를 지내는 원칙으로 자손들이 모두 제사비용을 분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분재기의 구성과 내용
문서의 처음에는 7남매가 모여 합의한 날짜를 기록하고 제사 지내는 원칙을 정하였다. 제사는 종가에서 지내되 일이 있을 때는 형제 가운데 담당자가 지낼 수 있게 하였으나, 기제사는 돌아가며 지내지 않도록 하였다. 제사 비용은 친자녀는 쌀 10되, 친손자녀는 5되, 친증손자녀와 외손자녀는 2되씩 지원하도록 하였다. 다음은 조상의 제사를 안정적으로 모시기 위한 봉사조와 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위한 묘직조로서 재산을 따로 배정하였다. 다음으로 이이 남매에게 배정된 재산 내역을 기록하였다. 재산은 크게 논밭과 노비로 나눌 수 있는데, 거의 균등하게 배분하였다. 논밭은 비옥도, 수확량 등을 감안하여 면적을 배분하였다. 노비는 봉사조 3명, 묘직조 5명과 서모 몫 3명을 제외한 108명을 7남매가 똑깥이 15명씩 나눈 후 남은 3명은 나이 순서대로 위로부터 1명씩 더 분배하였다. 이 문서의 집필은 맏형인 이선이 하였다. 마지막에는 재산을 나눈 내용에 합의한다는 표시로 참석자들이 서명인 수결을 하였다. 참석자 가운데 남편이 죽은 셋째딸은 서명하지 않고, 다른 딸들은 남편이 대신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딸도 제사를 지내는 조선전기
조선시대에도 딸이 제사를 지내는 때가 있었다. 16세기까지는 부모가 죽으면 아들 딸 구별없이 부모의 유산을 고루 나누어 물려받고 제사도 돌아가며 지냈다. 16세기 후반부터 제사를 모시는 풍습을 바꾸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1566년 이이의 남매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나눌 때 이이는 당시 관행이던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윤회봉사'를 반대하고 맏형이 제사를 전담하는 '장자봉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장남이 제사를 전담하고 재산을 많이 받는 것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사임당이 그렸다는 초충도

조선전기의 혼인풍습
조선전기에는 혼인한 뒤 남편과 함께 친정에 사는 여성이 많았다.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도 이이가 6살 때까지 친정인 강릉에서 살았다. 이는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가는 '남귀여가혼'으로 고려 이전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혼인풍습이었다. 나라에서는 성리학적 가정의례인 <주자가례>에 따라 신부가 신랑 집으로 시집을 오는 '친영례'를 장려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또 여성이 시집갈 때 가져간 재산은 남편 재산과 따로 관리하고, 유산의 상속도 별도로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책이나 문방구를 놓는 목가구


벼루집


대나무로 만든 편지꽂이


매와와 대나무를 새긴 벼루,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먹, 백자연적


선비들의 책상. 책을 읽은 횟수를 세는 도구가 놓여 있다.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 명필 한석봉이 쓴 글씨는 다양한 집안에서 가보로 소장하고 있으며, 천자문 글씨체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명필 한석봉의 글씨, 한호 필 감지금니 (보물 1078호)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명필 한호가 1602년에서 1604년 사이에 쓴 글씨를 모은 서첩이다. 흑지나 감지에 금니로 해서.행서.초서를 다양하게 썼는데, 말년의 친숙한 서풍을 보인다. 1,2첩은 최립 등 친구들이 지어준 시문, 자작시, 애호하던 중국 시문이고, 3첩은 도교경전을 필사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달밤의 매화 그림,

어몽룡은 이정의 대나무, 황집중의 포도와 더불어 조선중기의 삼절로 불린다. 꼿꼿이 솟아오른 가지가 매화의 선비다운 기품을 드러내며, 가지에 듬성듬성 핀 매화가 달빛과 어우러져 고아한 멋을 더한다. 어몽룡의 화풍은 조선중기 이후 새로운 매화그림의 전형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여러 선비들의 글씨를 모은 첩 .

명필 석봉 한호를 비롯한 문사 12명이 쓴 글씨가 실린 서첩이다. 백광훈, 이우, 김현성 등 주로 16세기에 활동한 선비들이 쓴 시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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