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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영조의 탕평정치와 정조대 문화의 진흥

younghwan 2011. 2. 4.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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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병자호란 이래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계속되어온 당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영조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역량과 권위로 조금이나마 제압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또한 중국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심으로 안정화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정조대를 대표하는 정책으로는 탕평책으로 대변되는 당쟁의 극복과 왕권의 확립, 균역법으로 대표되는 조세개혁을 통한 경제 안정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조대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학문장려, 중국 문물됩과 함께 크게 융성한 실학, 대량 출판을 통한 지식의 확산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큰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개척, 과학과 기술의 발전 등을 고려해보면, 중국.일본.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전쟁이 없는 안정된 사회를 구가했기때문에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서구에 비해 많이 뒤쳐질 수 밖에 없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을 것이다.

탕평과 문화의 진흥
18세기와 19세기 전반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큰 변화와 쇄신의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정치, 사회, 예술 전반에 걸쳐 성숙한 문화를 꽃피우게 되었고, 여기에는 중국 신학문의 유입과 지식인 우대정책, 실용학문과 문풍혁신운동이 주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영.정조의 균역법 시행, 준천사업, 규장각 설치 등 다방면의 정책 쇄신과 함께 지식인 사회의 사실주의적인 학문 경향은 실학과 진경이라는 풍조를 만들어 내었다. 한편 소외계층이던 중인출신들도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연행을 통한 북학, 서학의 영향 뿐 아니라 방각본의 대량 출판 등 출판문화의 확산이 기폭제가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의 어진, (보물932호). 복제품으로 원본은 궁중박물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영조가 51세때에 그린 모습으로 비록 초상화이지만 그림에서 그의 깐깐한 성격이 잘 드러나 보인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로 탕평책으로 당쟁세력을 제압할려고 노력했으나, 집권과정과 관련된 많은 루머로 인해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에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여가면서까지 국왕의 권위를 살리려고 했었다.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의 초상화이다. 이 그림은 5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인데 머리에는 임금이 쓰는 익선관을 쓰고, 양어깨와 가슴에 용을 수놓은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고 있다. 이 초상화는 영조 20년(1744) 장경주, 김두량이 그린 그림을 광무4년(1900) 당대의 일류 초상화가들이 보고 그린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와 정조
영조는 당쟁과 당화를 없애는 모든 방법을 강구한 적극적인 탕평의 임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자신에게 엄격했던 생활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조는 52년의 재위기간 동안 경연을 3,458회 실시하여 어느 왕보다 많은 경연을 통해 학문적으로도 신하들의 주장을 제어할 수 있었고, 천재지변에 근신하기 위해 음실을 줄이는 감선을 행하거나 금주령을 반포하고 사치품의 사용을 금하는 등의 조처를 자주 내렸다.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선대의 탕평정치를 계승하면서 왕실의 친인척을 인사에서 배제하고, 규장각을 세워 학문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궁궐 숙위를 위해 설치한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발전시켜 군사력을 집중시켰다. 노론과 소론을 견제하며 남인을 등용하는 정조 탕평론의 기초 위에서 사도세자의 권위 회복 선언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균역법에 관한 규칙을 적은책, 균역청사목. 균역법은 병역의 의무에 관한 법으로 당시 지방관들의 음성적인 수입의 당당부분을 차지했으며, 양반사회를 지탱해온 경제적 바탕 중의 하나인 병역관련 세금을 베로 납부하는 것으로 단순화한 제도이다. 하지만, 병역비리는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을 지탱해온 것 중의 하나로 균역법 시행 이후에도 지방관들이 횡포는 근절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 28년(1752) 4월에 작성되어 같은 해 6월29일에 간행.반포된 균역법 시행세칙을 적은 책이다. 균역청사목은 이 <원사목>이 반포된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개정이 있었는데, 이를 정리하여 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사목은 설청.결미.여결.급대 등 10개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책머리에는 영조의 유음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임금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그린 그림, <기사경회첩> 중 <영수각친림도>

영수각은 숙종이 기로소에 들 때, 왕이 직접 제목을 쓴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기로소 옆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영수각친림도>는 영조가 기로소에 들면서 영수각에 친림하여 어첩에 제목을 쓰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오봉병과 서안을 그려 왕의 존재를 표현하였다. <기사경회첩>에 수록된 행사 그림은 <영수각친림도>, <숭정전진하전도>, <경현당선온도>,<사악선귀사도>, <본소사연도> 등 모두 5폭이다.

영조가 51세되던 해인 영조 20년(1744) 9월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여 기로대신들에게 친히 베푼 연회 등 행사장면을 그린 그림과 참석한 기로신의 초상화를 함께 수록하여 제작한 화첩이다. 왕의 기로소 입소는 충효사상에 기반하여 왕권을 재확인하고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영조는 자신이 추진한 사업을 주제로 다양한 기념 계첩과 계병을 제작하여 자신의 통치를 선양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장치로 활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의 탕평정치
탕평이란 조선후기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고 정치 세력간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정책이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던 정국을 타파하기 위해 <신유대후>을 반포하여 탕평정치의 기반을 다졌다. 탕평파 관료의 신임과 인재의 발탁에 적극적이었던 영조는 영조 31년(1755) 나주의 흉서 사건으로 7개월여 간으 국문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고 나라의 정책을 밝힌 <천의소감>을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 송준길의 문묘배향을 실행하고, 영조 40년(1764)에는 소론에 대한 배려로 박세채의 문묘배향을 지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탕평을 거의 마무리하면서 영조는 <속대전>과 <속오례의>를 편찬하였다.


영조 집권의 정통성을 밝힌책, 천의소감. 영조의 탕평책이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 했으나,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숙종대의 붕당정치의 연장선상에서 집권과정의 많은 루머로 인해 집권한지 수십년 후에 이런 책을 만들 정도로 정치적인 탕평책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경종1년(1721) 영조 자신이 경종의 왕세제로 책봉될 때부터 영조 31년 (1755) 나주 흉서사건까지 정치적 사건들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 영조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이를 통해 영조는 집권의 정통성을 밝혀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고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영조가 지은 사도세자의 묘지명. 사도세자 원래 무덤인 영우원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영조가 직접 글을 지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극진했던 정조가 이런 것을 챙기지 않았을리가 없는데, 아마도 정조의 명에 의해 고의로 영조가 쓴 묘지명을 방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묘지는 영조가 죽은 아들인 사도세자를 위해 직접 지은 것으로 '늙은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이 자식을 죽이는 일을 하게 했다.'는 영조의 깊은 탄식과 변명이 적혀 있다. 이 묘지는 사도세자의 첫 무덤인 영우원터에서 휘지 등과 함께 발견되었다. 수원으로 이장할 때 옮기지 않고 폐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다른 형 효장세자가 어린 나이로 죽자 그 뒤를 이어 세자로 책봉되었고 영조 25년(1749)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대리청정을 하였다. 영조 31년 (1755)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나주객사에 영조와 노론을 비방하는 내용의 흉서를 붙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사도세자의 보호세력인 소론의 영향력이 약해지게 되었고, 1757년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와 대왕대비인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세자는 마지막 의지처마저 잃게 되었다. 결국 정치적 소용돌이와 자신의 과실로 인하여 아버지 영조로부터 미움을 산 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죽고 양주 배봉산에 묻히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의 의궤
의궤란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의 중요 의식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주요 의식으로는 국왕의 혼인을 비롯한 세자의 책봉, 왕실의 잔치와 장례, 궁궐의 건축 등이 있으며 이러한 행사가 끝난 뒤 임시기구인 도감을 만들어 편찬하였다. 도감에서는 일방, 이방, 삼방 등이 담당한 업무 내용을 정리하였고 필요한 경우 도설과 반차도 같은 그림자료를 정리하였다. 정조 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나 화성 건설에 관한 기록인 <화성성역의궤>등의 일부 의궤는 활자본으로 제작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의 기록, 휘경원천봉원소도감의궤(1863). 실록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기록문화로 의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의궤는 그 내용의 자세함으로 인해서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의 하나로 여겨진다. 실제로는 그전부터 의궤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영.정조대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철종 14년(1863) 양주 순강원에 있던 현목수빈묘인 휘경원을 양주 달마동으로 옮기기 위해 묘자리를 준비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되다가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어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1993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 전달되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영구 기탁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임금이 내린 책에 찍는 인장, 선사지기 인장


무예와 전술을 정리한 책, 무예도보통지. 정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책자 중 하나이다. 태권도를 비롯하여 현재 성행하는 많은 무예들이 이 책자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조선시대 책자 중의 하나이다.

정조의 명에 의하여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가 무예와 전투기술을 표준화하고자 만든 책이다. 전투할 때 사용되는 각종 무기를 비롯하여 24가지의 서로 다른 무예가 그림과 함꼐 설명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규장각으로 사용한 창덕궁 주합루 그림, 김홍도 필 창덕궁 주합루도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주함루는 2층 누각으로 그 아래층은 한때 규장각으로 사용되었다. 규장각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글, 글씨, 그림 또는 명령이나 유언을 적은 글이나 왕실 족보 등을 보관하였다. 특히 정조는 학식이 높은 신하들을 모아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게 하고 서적을 출판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가 신하에게 보내 편지
정조가 쓴 편지로,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것과 심환지에게 보낸 것을 모은 첩이다. 당시 남인의 지도자 채제공과 정국을 함께 주도한 노론의 지도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첩과 두루마리 형식으로 봉투에 '삼청동즉전'이라고 쓰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가 신하에게 보내는 편지
정조가 여러 신하나 친인척들에게 보낸 편지가 최근 공개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66건의 정조 편지가 소장되어 있고 이들은 정조가 외삼촌인 홍낙임에게 보낸 것과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다. 홍낙임에게 보낸 편지는 어머니 혜경궁의 안부를 전하거나 집안의 경사를 기뻐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반면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당시의 정치적 현안들을 조정하며 정국을 이끌어 가고자 했던 국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수원의 화성 축성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 화성성역의궤. 수원 화성 건설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서 실록과 함께 우리나라 기록문화를 대표하는 문헌이다. 수원화성은 건축적인 측면에서의 기술적인 독창성, 규모의 웅장함 등에 있어서는 중국의 많은 읍성이나 우리나라의 다른 산성에 비해서 아주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축성과정과 목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때문에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이른 시기에 등록된 것으로 보여지면, 수원화성과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이 문헌일 것이다.

화성을 축성한 뒤 화성의 설계도와 당시 투입된 인원, 재정, 조직 등의 내용을 담아 간행한 종합보고서이다. 화성에 설치된 각 시설물과 축성 기계들의 설계도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동원된 석수, 목수, 미장이와 같은 장인들이 직종별, 지역별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고 장인들의 이름, 일한 곳과 날짜, 임금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화성성역의궤에는 다양한 그림과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조가 화성에서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른 그림, 을묘원행정리의궤도

원행은 왕이 원에 행차함을 뜻한다. 원이란 왕실의 묘소 가운데 세자, 세손과 그 배우자의 묘소, 기타 왕을 낳은 후궁의 묘소를 가리킨다. 정조는 재위기간(1777~1800년) 중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13번 다녀왔으며 이 원행정리의궤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을묘년의 행차를 정리한 책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조의 정치적 처분이 정당함을 밝히는 책, 명의록, 임진자로 인쇄한 책


임진년에 만든 금속활자

갑인자의 글씨체를 글자본으로 한 금속활자 가운데 다섯번째로 만든 활자로 오주갑인자라고도 한다. 1772년 임진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으 주관으로 큰 자와 작은 자 15만 자를 만들어 교서관에 보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여러차례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갑인자의 글씨체가 가장 아름다워 여러 차례에 걸쳐 같은 글씨체의 활자를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두번째로 만든 정리자 큰 활자

정리자는 정조 19년(1796)에 만든 활자를 일컫는다. 글씨체는 청나라 때 만든 사전인 <강희자전>의 글씨체를 바탕으로하였다. 철종8년(1857) 활자를 보관해 두었던 주자소가 화재로 정리자가 불타버리자, 이듬 해 다시 정리자를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수원의 화성 축성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 화성성역의궤. 1796년 <정리의궤> 등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초주정리자로 인쇄한 책



활자 보관용 장

이 장은 조선후기 국가에서 만든 활자를 분류아여 보관하던 장이다. 활자들은 부수별, 또는 기증별로 분류하고 수를 헤아려 활자 보관 상자에 담은 후 활자 보관용 장에 끼워 보관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자보를 통해 조선시대 활자의 분류와 정리방식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호수가 명필로 알려진 한구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여 동활자 8만여자를 주조한 것이 임인자이다. 이는 김석주 가문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한구자를 다시 주조한 것으로, 재주한구자라고 불린다.


규장각 문신들의 글 모음, 규화명선. 두번째로 만든 한구자로 인쇄한 책이다.


조선후기의 활자인쇄
조선후기에는 왕실의 활자 제조를 통해 관찬서의 출판이 활발하게 되었고 민간의 방각본(상업을 목적으로 한 책) 출판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먼저 영조 48년(1772) 갑인자로 인쇄한 <심경>,<만병회춘>을 자본으로 주조한 15만자를 임진자라 하는데 영조 51년(1775)까지 간행되었다. 임진자보다 5년 후에 이루어진 정유자는 정조 즉위년 (1776)부터 거의 130여 년간 사용되었다. 어제, 어정, 어찬 및 윤음 등의 서적 대다수가 정유자 인본이며 규장각 도서로 남아 있다. 또한 청의 서고전서를 찍은 취진판식활자를 본 떠 만든 생생자를 자본으로 하여 정조 19년 주조한 것이 정리자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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