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서울과 지방, 조운과 조창

younghwan 2011. 2. 7. 21:21
반응형


 조선시대를 이야기할 때는 주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치와 사회, 과거제와 관료제, 붕당정치 등을 위주로 하기때문에 지방의 통치조직이나 통치제도에 대해서 논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특히, 조운과 교통로, 도시의 발달과 역할 등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작년에 개편된 중앙박물관 조선실에는 조선시대 지방통치와 조운, 교역과 상업의 중심이었던 나루와 포구에 대해서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전시된 내용 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조선시대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 그림>을 들 수 있다. 옛말에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이라는 말이 실감할 수 있는 화려한 잔치그림이다. 여러 문헌과 연구자료 등에서 조선시대 관료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의 근간이 되는 지방수령들의 착취에 근거한 경제력을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장면과 함께 박문수로 대표되는 암행어사 제도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 춘향전을 비롯한 여러 이야기에서 암행어사에게 바랐던 일반 대중들의 바램과 지방관헌들의 착취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 그림,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대동강에 베를 띄워놓고 평안감사가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다. 국왕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펼치는 연회에 결코 뒤지지 않는 화려한 잔치의 모습이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의 화려한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대동강 위에는 평안감사가 탄 배를 중심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 및 관선이 늘어서 있고 뒤로는 관기들이 탄 배, 음식을 준비하는 배, 사대부나 아전들이 탄 작은 배들이 따르고 있다. 강가에서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으며, 성안 마을 집집마다 환영 깃발이 세워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지방 관원의 업무를 평가한 문서, 임신 추동등 포폄 제목, 고종 9년(1872). 감사가 지방관원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한 문서로 보인다.

전라도 지방 관원들의 업무에 대해 상,중,일천(임용한 날짜가 얼마 지나지 않음) 등으로 평가를 내린 문서이다. 모두 세 단으로 적여 있는데 첫째 단에는 관직폄이 판관, 목사, 부사, 군수, 현감, 찰방 등의 순서로 적혀 있고, 둘째 단에는 관원의 성명이, 셋째 단에는 상과 중으로 포폄의 내용이 적혀 있다.


한양지도, 도성도

조선시대의 서울인 한성의 성곽 내부를 자세히 그린 지도이다. 특히 조선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종묘.사직 등이 강조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북한산, 남쪽으로는 서빙고, 서쪽으로는 불광천, 동쪽으로는 청량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성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구역과 각부를 구성하는 방들의 영역이 표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한양가 목판

한양가는 작자.연대 미상의 가사로 한산거사의 <한양가>와 같이 한양의 풍물을 노래하고 있다. 한양의 유래와 지세를 노래한 뒤 여러 궁궐의 배치, 내직과 외직의 관아 모습, 서울 시가의 풍경, 저자에서 거래되는 상품 그리고 청루의 풍류 등을 노래한 뒤, 태평성세의 백성으로 태평가를 부르자는 가사로 끝을 맺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후기 서울과 지방
18세기를 전후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인구의 자연증가와 농민의 계층분화가 심화되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다.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금속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도시민의 증가로 상품의 유통이 활발하게 되자 전국 각지에 장시와 포구가 개설되고 이들을 연계하는 원격지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수공업 생산의 증가 그리고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상좌우도 지방관리들의 명부, 19세기. 조선시대 경상도 각고을 수령들의 명단과 임명시기를 적은 글이다. 아마도 감사가 하부 기관들을 감독하기 위한 작성한 자료이거나, 각 고을 수령들이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만든 자료가 아닐까 생각된다. 각 고을간의 우열관계와 수령들간의 상하관계를 정리할 목적인 듯 하다.

문서의 앞 뒤면에 각각 경상우도와 좌도의 주요 관료들의 명단과 임용 시기를 적은 인사 관련 장부이다. 상하 네 단으로 구성되어 첫째 단에는 관직명이, 둘째 단에는 관원명과 임명 연월일을 별도의 종이에 적어 임용순으로 덧대어 붙여 놓았다. 셋째 단에는 관할지역의 이름과 면적이, 넷째 단에는 전임 관원의 이름과 품계와 임명 연월일이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압록강 국경지역을 그린 군사지도, 청북변성도. 국경지역의 국방을 위해서 만든 지도로 보인다.


<화성능행도병> 중 시흥에서 어가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한강을 건너는 뱃다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12첩으로 이루어진 압록강 국경 지역의 군사지도이다. 지도에는 평안도 의주, 삭주, 창성, 벽동, 초산, 강계 지역의 지리와 읍의 가호 수 등에 대한 설명을 서술하고, 각 로로 통하는 주요 도로와 거리를 표시하였다. 진 이름은 네모꼴 패 안에 큰 글씨로 적고 관문과 보루, 새장, 파수의 위치 등을 표시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에 있었던 무장현 관내도이다. 읍성내부의 관아 배치를 비롯하여 관할지역내 산, 강, 교통 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관할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만든 지도로, 이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많은 군현의 관내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사용을 위해서 대량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현 관내도 나타난 조선시대 읍성내 주요 관아 건물의 역할 및 배치도.

조선시대 지방지도 들여보기
조선시대 지방의 마을을 그린 지도를 군현지도라고 부르며, 행정구역의 기본 단위인 부,목,군,현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군현지도에는 마을의 중심지와 주변 지역 등 지방 사회의 생활공간이 잘 묘사되어 있다. 관청,향교,읍성 등의 주요 시설을 마을의 중심에 표시하고, 주변의 산과 강 등 자연환경, 지명, 교통로를 표기하여 이해를 도왔다. 이러한 군현지도는 지방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전라도 무장현(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지도는 읍성의 내부가 크고 상세하여 동헌과 객사 등 관아의 실제 모습이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남문 앞에 시장이 있고 해안에는 고기를 잡는 도구의 일종인 어전이 그려져 있는 것이 흥미롭다. 또한 지도의 여백에는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인구의 수, 논밭의 면적 등을 적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어사 박문수의 초상, 보물 1189호. 박문수(1691~1756)는 조선 영조 때의 문신으로 1723년 병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다. 붉은색의 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화법이 정교한 반신상의 그림이다.


암행어사를 상징하는 징표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마이용권인 마패


암행어사가 지방을 시찰하고 임금에게 올린 글, 암행어사 서계. 암행어사의 활동은 국왕에게 보고서를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이며, 춘향전에 나오는 암행어사가 고을수령을 파직하고 혼내주는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고, 고을 수령의 착취에 시달리던 많은 민중들의 바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실제 남원부사는 지방수령 중에서 상당히 직위가 높은 사람으로 초임 관료가 대적하기에 쉽지않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퇴계 이황선생만 하더라도 당대 이름높은 학자였지만, 부사보다 직위가 낮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고 있었다.

고종11년 (1874) 3월22일에 충청좌도의 암행어사에 임명된 김명진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서계이다. 대개 함행어사로 파견되면 임무를 마친 뒤 지방관의 업적은 서계로, 마을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 등은 별단으로 보고하였는데 이 문서에는 서계만이 적혀 있다. 앞부분에 어사로 파견된 내용을 간략히 적고 다음에는 지방관의 업적을 조목조목 적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암행어사란
암행어사 제도는 조선시대의 독특한 관리파견 제도였다. 재주가 뛰어난 신하를 국왕이 직접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생활과 지방 관리들의 시정 득실을 몰래 관찰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국정에 반영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조운과 조창. 조운은 각지방에서 거눈 현물조세를 운송하던 제도로 주로 강과 연안바다의 해로를 이용하였다. 조운상의 주요 거점에는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설치한 창고인 조창이 설치되었다. 전국적으로 조장은 강원도 (원주 경흥창, 춘천 소양강창), 충청도 (아산 공진창, 충주 가흥창), 황해도 (배천 금곡포창, 강음 조읍포창), 경상도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 사천 통양창), 전라도 (용안 덕성창, 영광 법성창, 나주 영산창)에 설치되었다.

조운은 각 지방에서 거둔 현물 조세를 수도인 한양으로 운송하던 제도이다. 강을 이용할 경우에는 수운, 바다를 이용할 경우에는 해운이라 하였다. 육로를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도로와 운송수단의 문제로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조세로 거둔 쌀이나 곡물과 같은 현물을 수송하기 위해 강과 바다의 출발지와 도착지에 창고를 설치하고 일정 기간 정장해 두었다가 중앙의 경창(군자창, 풍저창, 광흥창)으로 운송하였다. 도성에 가까운 경기도와 강원도 철원, 평강, 금화군 등의 세곡을 육로로 경창에 직접 납부하였다.


지도로 보는 한강나루. 조선시대의 한강은 서울로 모여드는 조운과 상품유통의 동맥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한강 가에 설치된 나루터는 주요 간선도로와 연결되어 남북 교통망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한강, 노량, 양화도, 삼전도, 임진도에 별장을 두어 나라에서 관리하였다.


조선시대 한강 나루터의 모습. 나루터를 관리하는 관청 건물이 보이고, 나루터에 정박한 화물선, 강을 건너던 나룻배 등이 정박되어 있고, 주막과 장시 등이 형성되어 있다.


한양 중심부의 주요 나루터


한강 하류와 상류지여의 주요나루터.

한강에는 많은 나루터가 있었으며, 각 나루터마다 독특한 기능과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1) 광진: 의정부 동두천에서 내려와 광주, 여주, 충주 쪽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예로부터 왕래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초기부터 별감을 두어 사람의 출입을 살피게 했다.

2) 송파진:  전국의 15대 장시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서울 외곽에서 가장 번창한 난전을 이루었다.
   서울로 공급되는 경기도의 쌀, 숯, 연초, 소, 채소, 곡식 등이 모두 송파나루를 건넜다.

3) 삼전도: 한강 남쪽의 요새지인 광주부로 직접 통하는 제일 빠른 길목으로 번성했으나, 조선후기에는
   송파나루가 이를 대신하였다.

4) 도모포: 어물, 목재, 고추, 마늘, 감자 등 농산물의 집산지였으며 동빙고가 있어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모여들었다.

5) 한강진: 조선시대 제일의 나루터였으며 근처에 서빙고가 있었다. 서빙고에는 대략 137,974장의 얼음을
   저장하였다.

6) 동작진: 한양 도성의 남대문을 지나 과찬으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목이었다.
7) 노량진: 지형이 편리하여 백성의 부담이 적었기 때문에 임금이 온천이나 능에 행차할 때 거너는 나루로
   주로 이용되었다.

8) 용산포: 경상, 강원, 충청, 경기 상류의 조운이 모이는 곳이다.
9) 서강: 황해.전라.충청.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모였던 곳이다.
10) 마포: 서해에서 들어오는 생선, 소금, 새우젓이 모인 곳으로 특히 새우젓이 유명하였다.
    관원에게 녹봉으로 주는 곡식을 보관한 광흥창이 있었다.

11) 양화진: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곳이다. 서해에서 한강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