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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대한제국의 흔적들

younghwan 2011. 2. 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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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박물관 조선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구한말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역사를 말해 주는 유물들이다. 박물관에서는 구한말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시기를 근대화를 향한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데, 그렇더라도 구한말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보면 그렇게 좋은 기분을 주지는 않는다.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는 유물로 그가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 중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세웠던 척화비가 전시되어 있고, 외세와 기득권에 저항한 농민운동인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사발통문을 전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로 대한제국의 성립과 근대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구한말은 격변하는 세계정세와 중국 정세를 당시 집권층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했는지에 대한 유물들과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와 무능함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유물과 기록들이 전시되어 후대에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곳이다.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내용의 비석, 척화비. 이 비석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대표하며, 쇄국정책은 후대 사람들이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지고, 멸망하게 된 큰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아편전쟁 이후 피폐된 중국 청나라의 정세를 듣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취할수 있는 여러 정책 중 하나라고 보여지며 이를 폄훼하는 것은 바림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시 집권세력의 부패로 인한 국가재정과 경제력의 피폐가 더 큰 원인이었던 것 같은데, 이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19세기에 서양세력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의 최고 실력자인 흥선대원군은 서양세력과 교류하지 않는 소위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정책의 하나로 도성 및 전국 각지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이 비는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개항을 반대한 학자 이항로의 글을 모은책. 이항로 선생 본인은 청렴하게 살았고 그의 주장은 그리 나빠보이는 않지만, 당시 기득권세력들이 이를 이용한 측면이 많아 보인다.

서양세력을 배격한 대표적인 유학자인 화서 이항로의 시문집이다. 고종 3년 (1866) 동부승지 등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에서 이항로는 서양세력과 화의를 하면 짐승과 같은 상태로 빠지게 될 것이라며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동학농민전쟁 참가자들의 연명서, 사발통문. 동학농민전쟁 당시 지도부의 목숨을 건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사발통문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의 명단을 돌려 적은 통문이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명이 고부성을 함락하여 군수 조병갑을 비롯한 악독한 관리를 없애고 전주감영을 함락시킨 뒤, 서울로 곧바로 향할 것을 결의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개항 - 척사와 개화
고종 13년(1876) 일본과 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이에 반대하는 척사파가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이 일어나고, 고종 31년(1894)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다. 한편 갑오개혁(1894)에 이르러서는 신분제를 법률적으로 폐지하는 등 기존의 제도를 근대적인 제도로 바꾸어 나갔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어진, 전 채용신 필 고종어진. 이전의 어진에 비해서 사진과 같은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아마도 사진이 들어온 이후에 그린 것이라 경쟁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평상복인 황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원래 왕의 평상복은 붉은색 곤룡포와 익선관이었는데,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이 그림과 같이 황룡포를 착용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화를 향한 노력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도 서양 세력의 개방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병인양요(1866).신미양요(1871)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 13년(1876) 조선정부는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전쟁. 갑오개혁(1894)이 일어났다. 광무 원년(1897)에 조선의 자주권을 유지하고 근대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권이 일본에 의해 침해당하자, 한국인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항일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항 이후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신문과 같은 근대적 출판물이 간행되고, 학교.의원이 세워지고, 철도와 전신이 설립되는 등 새로운 제도와 문물이 생겨났다. <출처:중앙박물관>


갑오개혁 떄 궁내부에 걸었던 현판

궁내부는 왕실에 관한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고종 31년 (1894) 갑오개혁 때 만들어졌다. 갑오개혁기에 왕실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부와 국가 운영을 담당하는 의정부가 분리되는 관제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개혁으로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을 구분하는 등 근대적인 개혁조치가 이루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글 문법책, 국문정리. 한글 문법을 최초로 정리한 연구서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크게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1897년 이봉운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문법 연구서이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글은 언문에서 국문으로 격상되었으나 제대로 된 연구서와 전문가가 없었다. 이 책은 독립신문에 실렸던 서재필과 지석영의 논설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한글만으로 글을 짓고 띄어 쓰기를 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36개 나라의 국기가 있는 세계지도, 세계전도

세계를 2개의 반구로 나누어 그린 세계지도로 광무 4년(1900)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에서 중간한 것이다. 동반구와 서반구도가 상하로 붙여 장황되어 있으나, 원래는 좌우로 배치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반구 위에 '조선' 등 18개국, 서반구 위에 '애급' 등 18개국, 총 36개 국가의 국기를 원색으로 수록하고 각국의 이름을 한자와 한글로 함꼐 표기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
대한제국은 외세의 영향력이 커져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외국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성립되었다. 건양 2년(1997)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기고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또한 왕을 황제라 칭하고 국내외에 황제국임을 선포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 황제의 인장, 칙령지보

1897년 고종 임금이 대한제국 황제에 오르면서 만든 국새 가운데 하나로 통신조서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 외교 문서에 사용한 '대한국새', 포상에 사용한 '황제어새', 고급관리의 사령장에 사용한 '제고지보', 군대의 통수에 사용되었던 '대원수보' 등이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종의 외교고문 데니가 소장했던 태극기, 고종 27년(1890) 경, 등록문화재 382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져 있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Owen N. Denny)가 1890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던 태극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태극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져 있다. 팔괘문의 형태는 지금과 같으나 색은 청색이다. 제작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를 매다는 끈이 오른쪽에 남아 있어 태극기의 오른쪽을 국기봉에 매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미국인 목사 윌리엄아서 노블 부부가 소장했던 태극기

1892년부터 1936년까지 우리나라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한 미국인 목사 윌리엄 아서노블과 그의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이 소장했던 태극기이다. 이 태극기는 박음질로 천을 덧대어 태극과 사괘 문양을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매티 윌콕스 노블이 쓴 친필.
글씨 내용은 'Korea Flag up to Japanese Occupancy(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국국기)'인데, 이는 노블 목사 부인 매티 윌콕스 노블의 친필이다. 이들 부부는 일제강점기에 이 태극기를 파기하라는 일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보존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독립협회에서 만든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

건양 1년(1896) 4월 서재필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사에서 '전국 국민을 위한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하고 고발할 것'을 천명하였다. <독립신문>의 발간은 민중을 위한 민간 발행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으나, 대한제국 정부와의 마찰로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개신 유학 관료들이 주도하여 만든 신문, 황성신문

광무 2년(1898) 9월 5일 남궁억 등 개신 유학 관료들이 <황성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창간한 일간 신문이다. 광무 9녀 (1905) 11월 20일에 실린 장지연의 노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하다. 1901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다가 같은 해 9월 14일 폐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강화도 병영에서 사용한 화승총. 19세기말이면 세계적으로 기관총이 널리 사용되었던 시기인데, 이런 총으로 외세에 저항한다는 것을 말이 그렇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대한제국 때 강화도 병영에 보관되었던 화승총이다. 나무로 만든 총신에 '신축년에 강화의 무기고를 고쳐 격납했다.'는 내용의 붓글씨가 쓰여 있다. 이를 통해 이 총이 1900년대 강화도의 대한제국 진위 제1연대에서 보관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식 호적

건양 2년(1897) 충청남도 홍산군 남면 마동리 제6통 제3호에 거주한 농민 박준달의 호적이다. 이 호적에는 박준달, 부인 문씨 그리고 아들과 달 등 4인 가족이 기재되어 있다. 개별 가호에서 가족 사항을 적어 관청에 신고하는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달리, 관청에 의해 정해진 양식에 따라 가족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극기가 그려진 대한제국기의 여권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의 신분과 국적을 증명하고 그의 보호를 의뢰하는 문서이다. 이 여권은 광무 8년(1904) 12월 19일 외교 담당 관청인 외부에서 박기오에게 발행한 여권이다. 왼쪽에는 영어와 불어로, 오른쪽에는 한자로 여권의 내용이 기입되어 있고, 1년간의 유효기간이 명시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극문양의 대한제국 훈장

대한제국의 훈장제도는 광무 4년(1900) '훈장조례'를 공포하면서 처음 시행되었다. 원래 금척대수정장, 이화대수정장.태극장.자응장 4종이 있었는데, 이후 팔괘장(1901).서봉장(1907)이 추가되었다. 전시된 훈장은 대한제국 3등 훈장 태극장, 대한제국 3등 훈장 팔괘장, 대한제국 7등 훈장 태극장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식 화폐


구한말 우리나라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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