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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후기 신분의 변화와 여성들의 생활

younghwan 2011. 2. 8.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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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를 거치면서 양반을 중심으로 한 신분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기득권층인 양반.권문세가는 상속을 통한 경제력분산을 막기 위해 장자위주의 상속으로 부의 집중화를 추구하였으며, 기득권에서 소외되는 양반계층도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반면, 양반과 양인의 중간계층인 중인이라 불리었던 양반의 서자, 서리, 기술직 등은 그들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여 부를 축적하고 구한말 근대화 시기를 주도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의 삶은 조선후기의 정착된 장자상속제 등의 변화에 따라서 조선전기에비해서 사회적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여자들의 삶은 모습은 대부분 조선후기 여성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후기 여자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생활도구나 한글로 쓰여진 각종 문서나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중앙박물관 조선실이나 궁중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한글 자료들을 보면 조선후기에는 한글이 일반대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희룡의 난초 그림과 글씨. 우봉 조희룡은 조선후기의 중인 화가로 김정희의 문인이다.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는데 글씨는 스승의 서체인 추사체를 본받았고 그림은 나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중인들의 모임
조선시대의 신분 중 양반과 양인의 중간 계층을 중인이라 불렀다. 예컨대 양반의 서자, 향리, 서리, 기술직 중인 등이 바로 그들이다. 17세기 이후 잡과 합격자들을 중심으로 서울북부에는 경아전과 일부 기술직 중인이 모여 살았다. 18세기로 오면서 유수한 중인 가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혼인 역시 이들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풍류 활동은 주로 서울의 북쪽 인왕산 기슭을 본거지로 하여 필운대, 세심대, 수성동, 옥류동과 경아전의 집단 거주지인 북악산 아래 특히 상청동과 탕춭대 등 경치 좋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였다. 이러한 중인들은 시회와 계회 등의 활발한 모임을 통해 사대부 문인들의 문화적 성향을 공유하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중인들의 계모임을 기록한 글과 그림, 금란계첩. 중인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인데 당시 이들의 상당한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화첩 형식의 계회도로 1면에는 '금란계장'이라는 제목을, 2,3,4면에는 서문을, 5면에는 계회 장면을 그렸다. 이 계회도의 서문에 의하면, 안시윤이 정사년 음력 3월 보름에 자사재, 묵자와 북한산 중흥사에 묵으면서 이웃의 여러 벗들과 계를 이루어 모임을 가진 후 그 일을 기록하고 그렸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보부상의 도장과 도장함. 각종 박물관에서 조선후기 보부상들의 도장과 인장함 등의 자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유물들은 대부분 구한말 민씨일가를 비롯하여 집권세력의 앞잡이 역할을 하면서 특권을 얻어내었던 보부상 조직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물들이 조선시대 보부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데는 의문이 많이 생기는 부분이다. 

조선말기부터 충청남도 임천, 은산, 흥산 일대에 활동한 보부상이 사용하던 도장함과 도장이다. 보부상 조직의 임원이었던 영위.반수.장무원 등이 사용하던 것들이다. 영위는 조직의 최고 고문에 해당하며, 반수는 그 다음 직책이다. 장무원은 실무를 담당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보부상 관련 서적

조선말기 보부상 조직과 관련한 각종 책자들이다. 보부상 조직의 임원 명단, 보부상의 관련 규정, 정부에서 보부상의 권리를 확인해 준 문서 등이다. 당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상인 단체로 성장한 보부상의 활동 내용, 조직 구성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여성들의 화장 도구 상자


비녀와 뒤꽂이


정조의 누이 청연군주의 옥비녀와 옥합


정조의 누이 청연군주의 대례복

대례복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 때 입던 예복으로 조선시대에는 오례에 따라 제복.조복.공복.상복.시복을 착용하였다. 이 옷은 원앙문의 금박을 입힌 원삼으로 뒷길이가 거의 바닥에 이를 정도이고 앞은 그 보다 약 30 cm 짧다. 화장(깃 중심에서 소매끝까지)의 길이가 짤아 품이 꼭 끼게 입었던 것으로 보이며 둥근 깃으로 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여성의 바느질 용구인 가위, 인두, 다리미, 다리미판


조선시대 여들들의 바느질 용구. 반짇고리는 바늘.실.골무.가위.자.헝겊 따위의 바느질 도구를 담는 상자이다. 실패와 자는 화각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쇠뿔을 얇게펴서 채색 그림을 그린 후 이를 나무 위에 붙여 장식하는 공예기법으로 화려한 규방문화를 볼 수 있다.


반닫이


김만중의 구운몽. 구운몽의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 중 한명인 서포 김만중이 쓴 한글소설이다. 작자가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한글 소설이나 한글번역 소설 중에는 당대의 유학자들이 쓴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이는 어린딸의 교육이나 노모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이런류의 글들을 썼다고 한다.

조선 숙종 떄 서포 김만중이 한글로 지은 고전소설이다. 2권1세속의 책으로 된 필사본으로 꿈속의 주인공 양소유가 세속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고 말년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글이 쓰여진 백자 접시와 소반

그릇에 쓰여진 한글에 의하면 이 그릇은 무신년 수강재 곳간으로 납품된 대.중.소 접시 20죽 중 일부이다. 수강재는 창덕궁에 위치한 별당으로 정조 9년(1785)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 자리에 세워졌다. 헌종 14년(1848)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처소로 중건되었다. 헌종은 이곳에서 학문을 즐겨 연구하였으며 그 중에는 한글 자료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원형의 천판에 3개의 굴곡진 다리를 갖춘 소형반이다. 크기가 작아서 음식상의 용도보다는 간단한 차를 올리는 찻상이나 음식상 옆에서 보조로 사용된 곁반으로 추측된다. 바닥면에서는 '신시큰젼고간다둥시십오듁'이라는 한글 명문이 있어 1881년에 대전 곳간으로 납품된 대.중.소 크기의 소반 150벌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죽'은 그릇 등의 열 벌을 묶어 세는 단위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리그릇을 싼 비단보자기, 보물 928호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양주 봉인사 부도암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구를 싼 비단 보자기이다. 보자기의 중앙과 가장자리에 발원자인 고종 대 김규홍과 그의 부인의 이름, 한글 발원 문구인 '귀남자성취', '귀남축원', '창성발원'과 같은 소원을 비는 글이 궁체의 먹글씨로 쓰여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효종 임금의 한글 편지. 이글 이외에도 국왕이 남긴 한글문서가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왕의 누이나 딸 등 친인척에게 보낸 서한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 장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이다. 인조 19년(1641) 1월 8일에 작성되었고 내용은 청음 김상헌의 고생에 대한 연민을 적고 있다. 이편지는 외국에서 썼다는 점과 주격 조사 '가'를 표기한 점이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글 편지를 적은 버선본

시집간 딸이 친정 부모님의 버선을 지어 드리기 위해 만든 버선본이다. 한글 부분은 두 분이 발에 맞는 버선을 신고 오래오래 사시고 훌륭한 자손을 두어 집안이 번창하고 복록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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