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절터

남원 만복사지, 김시습 소설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 무대

younghwan 2011. 2. 8. 17:40
반응형


 남원읍성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었던 만복사는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 잘 알려진 사찰이었다. 고려 문종때 세워진 이 사찰은 지금 남아 있는 절터와 당간지주의 크기로 봤을때도 호남지역에서는 아주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은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금당을 두고 있었던 아주 큰 사찰로 지금 서쪽편 금장자리에는 불상을 올려 놓았던 아주 큰 불상대좌가 남아 있어 당시에 사찰규모를 짐작케 해 주고 있다. 만복사는 남원읍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고려시대 평지 사찰로 남원 광한루와 함께 지리산 입구에 위치한 남원지역의 풍부한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찰이다.

 조선초기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생육신이자 당대의 천재로 이름을 떨친 김시습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잘 알려진 금오신화의 다섯편 이야기 중 하나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이 곳 만복사이다. 만복사는 임진왜란때 남원성 전투로 왜군에 의해 불타버리기 전까지는 상당히 번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김시습이 소설의 무대로 만복사를 선택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크게 번창했던 사찰로 보인다. 지금 남아 있는 유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오층석탑(보물 30호), 불상좌대(보물 31호), 당간지주(보물 32호), 석불입상(보물 43호)가 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만복사지는 1탑, 3금당의 가람배치로 전형적인 고구려의 사찰 가람배치라고 한다.


남원 만복사 옛 절터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석인상. 두눈을 부릅뜨고 뒤를 돌아보고 있는 이 석인상에서 소설 '만복사저포기'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만복사 절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옛 목탑터. 만복사는 이 목탑을 중심으로 좌.우.뒷편에 3개의 금당을 두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이는 만복사의 성격이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의 사찰이 아니라 기도를 하러 절을 찾은 사람을 위한 불전을 중심으로한 사찰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목탑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들이 목탑터에 남아 있다.


만복사 목탑터. 정사각형에 가까운 구조를 하고 있다.


목탑을 오르는 돌계단. 축대를 높이 세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목탑을 밝혀주던 석등이 있었던 자리


목탑 서쪽편 금당이 있었던 자리. 이 금당터에는 불상을 올려 놓았던 화강석으로 만든 거대한 석좌가 있다. 만복사는 금당에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이 유명했다고 한다. 보통 사찰에서 보통 주불전은 목탑 뒷편에 위치하며, 동.서편의 불전은 보조불전의 성격을 갖는데, 서쪽편 금당의 석좌규모로 봤을때 주불전의 불상 크기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쪽편 금당으로 오르는 길.


거대한 불상을 모셨던 석좌가 남아 있는 서쪽편 금당터.


금당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만복사 목탑 동쪽편에 있는 금당터. 뒷편으로 만복사지오층석탑이 보인다.


금당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다른 지역의 절터에 비해서 잘 가공된 주춧돌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만복사지 목탑 동쪽편 금당터


만복사 목탑 뒷편에 있는 금당터. 이곳이 유명한 만복사 청동불상을 모시고 있었던 이층 주불전이 아닌가 생각되며, 금산사 미륵전과 비슷한 모습의 장륙전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춧돌 외에 여러 형태의 석조 유물들이 남아 있다.


금당 건물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만복사 절터 뒷편에 위치한 건물터로 설법을 하던 강당 건물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만복사 경내를 구성했던 금당 뒷편 회랑 건물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만복사 가람배치에서 제일 뒷편 강당 양쪽에 있었던 승방 건물터로 생각되는 건물터


만복사 절터 중앙 입구의 건물터로 출입문이 있었던 자리로 보인다. 일반 사찰에 비해서 출입문 건물터의 규모가 큰 편이다.


출입문 건물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만복사 입구를 지키던 당간지주. 상당히 큰 규모의 당간지주임을 알 수 있다.


만복사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의 지붕돌.


만복사지 석불입상.


남원 만복사지.




이 곳은 고려 문종(1046~1083)때 처음 세운 만복사가 자리했던 터이다. 처음 지었을 때,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근래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식 배치였다. 이 사찰은 김시습의 소설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까지 번창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1579) 때 불타 없어졌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석탑과 돌 유물 몇 개가 절터를 지키고 있어, 일면이나마 웅장했던 옛 사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경내의 국가지정문화로는 오층석탑(보물 30호), 불상좌대(보물 31호), 당간지주(보물 32호), 석불입상(보물 43호)가 있다. <출처:남원시청>

만복사저포기의 각 편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이승과 저승, 현실과 꿈들이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이 만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 양생(梁生)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처녀가 떠난 후 장가를 가지 않고 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내용이다. <출처:브리태니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터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한다. 발굴조사시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았으며 청자와 백자, 많은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등이 현재 절터 내에 남아있다.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의의가 크다. <출처:문화재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