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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보령 성주사지, 4기의 석탑이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

younghwan 2011. 2. 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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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사지는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서해안 대천해수욕장에서 내륙으로 고개를 넘으면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충남 서해안을 대표하는 옛 절터이다. 성주사 절터가 위치한 충남 보령의 서해안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중국.한반도.일본간 해상교역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며, 조선시대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영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해상교역상의 이점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았던 지역으로 보이며, 그런 연유로 해서 보령지역의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선종 사찰을 하나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절터의 규모나 석탑들로 볼 때는 상당히 규모가 컸던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곳 성주사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를 비롯하여 문화재로 지정되 4기의 석탑이 옛 절터에 남아 있다.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는 그 글을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유학자이 최치원이 지었다고 하며, 이는 당시 성주사의 위상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

 성주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선종 사찰로 가람배치에 있어서도 그 특성이 드러나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석탑과 금당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당시로서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금당을 중심으로 그 앞쪽에 5층석탑이 있고, 뒷편에 2기의 3층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순천 송광사를 비롯하여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 성격의 사찰들은 부처를 모시는 불전이나 석탑을 그리 크게 짓지는 않고, 승려들이 수행할 수 있는 많은 요사채들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 곳 성주사 절터 또한 금당 외에는 불전으로 보이는 건물터는 그리 많거나 넓어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금당 남쪽편에는 요사채들이 있었던 자리로 보이는 아주 넓은 건물터들이 남아 있다.



보령 성주사지 절터. 금당을 중심으로 4기의 석탑이 옛 절터에 남아 있고, 뒷편에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백광보월탑비가 있다. 금당을 중심으로 한 사찰의 영역을 그리 넓어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주위에 승려들이 묵었던 요사채 건물들이 있었던 터가 상당히 넓어 보인다.



성주사 금당 출입문과 주변의 회랑 건물이 있었던 자리. 성주사의 옛 모습은 현재 복원되어 있는 불국사에서 그 모습을 상상해 보면 옛 모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불국사도 황룡사 등에 비하면 금당은 작은편이데, 성주사는 불국사보다 금당 주변이 작아 보인다.


성주사 금당을 들어서는 출입문을 들어서면 당시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보물 19호인 성주사지오층석탑을 볼 수 있다. 그 앞에 있는 석등은 당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층석탑을 지나면 옛 금당터를 볼 수 있다.


성주사지 석계단. 금당인 대웅전에 오르는 돌로 된 계단이다. 원래 돌계단 양 옆에 사자상을 조각한 측면석이 있어서 이 사자상 측면석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사자상이 도난당해 현재는 계단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금당터에는 불상을 놓았던 석좌를 중심으로 건물 기둥을 놓았던 주춧돌들이 놓여 있다. 금당터의 넓이로 봤을 때 금당의 크기로 별로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선종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람배치의 경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옛 금당터 중앙에는 불상을 놓았던 석대좌를 볼 수 있다.


성주사지 금당터


금당터에서 본 오층석탑


금당터 뒷편에는 3기의 3층석탑이 있다. 이 중 서삼층석탑(보물47호)중앙삼층석탑(보물20호)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3개의 석탑을 나란히 두는 경우는 전례가 없으며, 아마도 그 중 하나의 석탑은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3기의 석탑 뒷편으로는 교리를 설법하는 장소인 강당이 있었던 건물터를 볼 수 있다. 강당터는 금당터에 비해서 많이 넓어 보인다. 강당터 한쪽끝에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 석불입상이 있다.


강당터에서 본 4기의 석탑과 금당터


강당 뒷편으로도 많은 건물터를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승려들이 기거하면서 수행하던 요사채 건물들이 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금당 남쪽편 회랑이 있었던 건물터. 주춧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금당 북쪽편 회랑이 있었던 건물터


보령 성주사지 건물터에 다양한 형태의 주춧돌을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주춧돌이다.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에 사용했던 주춧돌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주춧돌도 많이 볼 수 있다.


절터 뒷편에 위치한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 백월보광탑(국보 8호)를 볼 수 있다. 이 탑비는 예술성은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탑비의 비문을 당대의 문인이자 유학자인 최치원이 지은 글이라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놓은 것으로 보인다.


탑비 옆에는 이 곳 성주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편 등을 모아 놓고 있다.


금당터 남쪽편으로는 아직도 발굴 중인 건물터들을 볼 수 있다. 형태로 봐서는 금당터는 아닌 것 같고, 주로 승방이나 요사채인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지 절터 입구.



성주사는 통일신라 말에 유행했던 선종 사찰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지이다. 백제시대에는 전쟁에 죽은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오합사라는 절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 김인문이 이 지역을 봉지로 받은 이후 신라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 후 당에서 귀국한 낭혜화상이 왕자 흔의 요청으로 이곳에 중창한 것이 성주사이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에 2차에 걸쳐 크게 고쳐 지었고, 조선시대에도 중항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절의 규모가 크게 줄어 들었다. 현재의 중심 사역 이외에도 주변에는 많은 건물자리가 있는데 주위의 아름다운 산세와 어울려 웅장했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경내에는 최치원이 지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국보 8호)를 비릇하여 오층석탑(보물 19호), 금당 뒷편에 있는 3기의 삼층석탑(보물 20, 47호 외), 석등이 있고, 발굴결과 백제시대 와당을 비롯하여 소조불, 비석파편, 석제 조각품이 발견되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비석 머리와 받침이 있다. <출처:보령시청>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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