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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초기 분청사기

younghwan 2011. 2. 1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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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분청사기는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혀 다양하게 장식하는 도자기로 그 기술의 근원은 고려시대 상감청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청자의 주요 생산지인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가마들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화되면서 도자기를 만들던 장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분청사기는 만들어진 시기가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분청사기는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어, 고려청자, 조선백자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라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주로 민간에서 운용하는 가마에서 많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광주지역에 관요가 설치되고 국가에서 백제를 공급하게 하면서 쇠퇴기로 접어들어서 16세기 중엽에 역사속으로 사라진 도자기 제작기술이라고 한다.


물고기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보물 347호.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매병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기형은 고려 말 상감 청자에 가깝지만, 무늬를 표현하는데 인화 기법의 비중이 높아졌고 탁했던 유약이 향상되어 비교적 밝은 회청색으로 바뀐 점이 두드러진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청자 매병으로 높이 30.0㎝, 아가리 지름 4.6㎝, 밑지름10.4㎝이다. 고려 때 유행하던 매병은 조선시대 백자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분청사기로 그 맥이 이어지는데, 이 청자도 분청사기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가리가 도톰하여 청자 전성기 때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양이 복잡하고 구슬무늬와 변형된 구름, 연꽃무늬 등 분청사기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이 사용되었다. 몸통의 4면에는 구슬무늬와 2겹으로 동심원을 그렸고, 그 안에 2마리의 물고기를 각각 흑백상감하고 물결을 흑상감으로 처리했다. 동심원 밖으로는 점을 가득 찍어 채웠다. 위쪽으로 4곳에는 흑백상감으로 나는 학을, 허리 부위에는 꽃과 풀을 추상화하고, 그 아래 연꽃을 그렸다. 병 아가리 둘레에는 흑백상감으로 꽃잎을 간략하게 표현했고, 그 아래에는 덩굴로 띠를 둘렀다. 담청색을 띤 청자 유액에 가까운 유약을 사용하여 유약에서도 과도기적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풀꽃무늬항아리.인화무늬항아리, 조선 15세기

세종 임금의 장녀인 정소공주의 묘에서 출토되었다. 항아리의 형태가 태앙아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정소공주가 태어난 1412년부터 1424년경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화 분청사기의 초기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풀꽃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장흥고>가 새겨진 국화무늬 대접과 <밀양장흥고>가 새겨진 국화무늬 접시, 조선 15세기. 조선전기 궁궐에 납품하던 분청사기로 관청이름인 <장흥고>가 새겨져 있다.

<장흥고>가 새겨진 국화무늬 대접
황백색 분장토, 단정한 형태, 규칙적인 인화무늬가 조화를 이룬 대접이다. 안바닥에는 궁궐 내의 물품 보금을 담당하던 관청인 <장흥고>가 상감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밀양장흥고>가 새겨진 국화무늬 접시,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에 새겨진 글자의 종류는 관청과 제작 지방 그리고 장인의 이름을 적은 경우가 많다. <밀양 장흥고>라고 새긴 것은 중앙 관청인 장흥고에 바치기 위하여 밀양 지방 가마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인화무늬 매병, 조선 15세기


모란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상감 기법은 초기에는 단순한 선상감이었으나 점차 능숙한 솜씨의 면상감으로 발전하였다. 연꽃, 버들, 물고기 등을 전면에 큼직하게 배치하여 참신하다. 전라북도 부안군 우동리 가마터에서 비슷한 특징을 가진 도자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모란무늬 대접, 조선 15세기


꽃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편병은 물레로 둥근 형태의 병을 만들고 다시 양면을 두드려서 편평하게 만든다. 납작하지도 둥글지도 않은 모양인데, 이것은 두드리는 정도가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모란넝쿨무늬 편병, 조선 15세기. 양면을 두들겨 만든 납작한 병으로 한쪽으로 기운 듯 하면서도 적절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 모란꽃과 줄기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 모습이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단순함과 장난스러움을 연상시킨다.


넝쿨무늬 병, 조선 15세기. 화려하지 않으면서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모란넝쿨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몸체 밑부분까지만 백색 분장토를 발랐는데, 분장토를 바른 부분과 바르지 않은 부분의 경계가 분명치 않다. 이로 인해 청자나 백자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이 살아 있다. 전라남도 고흥군 운대리 가마에서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모란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연꽃넝쿨무늬 합, 조선 15세기 후반 ~16세기. 조선전기에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합의 모습이다. 합은 분청사기 뿐 아니라 금속기나 백자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뚜껑에는 물결과 넝쿨무늬를, 몸체에는 연꽃무늬를 그렸는데, 무늬를 그린 선의 흐름이 율동적이며 자연스럽다.


넝쿨무늬 항아리, 조선 15세기 후반 ~16세기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혀 다양하게 장식한 도자기로, 그 명칭은 미학자인 고유섭 선생이 '분장회청사기'라고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의 상감 청자에서 비롯되어 조선 전기인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 간 만들어졌으며, 고려청자와는 달리 생동감과 자유분방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에서 분청사기는 짧은 기간 동안 만들어졌지만 어느 도자기보다도 한국적인 미감을 담고 있다. 분청사기는 세종 연간에 해당한는 1418~1450년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450~1470년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는 도장으로 무늬를 찍고 흰 흙으로 메우는 수법의 세련된 인화 분청사기가 만들어지는데, 무늬가 촘촘하게 찍혀 그릇 전체가 하얗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무늬를 새기거나 파낸 박지조화 분청사기도 활발히 제작되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467~1468년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된 이후 국가에서 필요한 그릇은 백자로 제작하면서 지방 분청사기 가마들은 점차 지방관청과 일반 백성을 위한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분청사기의 질은 떨어진 반면 백자의 생산량이 늘어났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유행한 귀얄 분청사기와 분장 분청사기를 끝으로 분청사기는 16세기 중엽에 사라지게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분청사기 장식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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