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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후기의 백자

younghwan 2011. 2. 1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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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백자는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결과로 백자의 질이 많이 떨어졌다가 17세기말부터 다시 원래의 수준으로 질이 나아져 하얀백자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는 세계적으로 백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기로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여서 상당한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는 한편 유럽의 도자기 생산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도자기 생산 기술이 발전했던 시기인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은 전대에 비해서 도자기 생산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 세계적인 도자기 교역에서도 소외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백자의 질은 전대에 비해서 발전하기는 했지만 세계적으로 인상적인 도자기술을 만들지 못했으며, 그 기술 또한 구한말에 크게 쇠퇴하여 구한말 왕실에서는 서구에서 도자기를 수입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조선후기 백자 중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많지는 않고 실생활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백자 제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이는  그 시대에 만들어진 양질의 도자기는 주로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동시대에 다른나라에서 만들어진 도자기에 비해서 그 작품성의 뛰어나지 못한 점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달항아리, 조선 17세기, 보물 1437호. 달 항아리의 넉넉하면서 부드러운 곡선과 당당한 양감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느낌을 준다. 달 항아리는 17세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으며 18세기가 되면 입 부분의 각이 둥글게 벌어지고 몸체가 다소 길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높이에 비해 몸통이 약간 벌어져 보이는 둥근 구형이지만, 입지름에 비해 굽 지름이 80% 정도 작지만 전체적인 비례는 단정하고 안정적이다. 입과 굽의 높이도 서로 적당하여 잘 어울리며, 몸통의 접합부가 비교적 완전하여 부분적인 쳐짐이나 비틀림도 거의 없다. 유태(釉胎)는 비교적 안정적이며 유약의 두께는 얇지만 태토에 완전하게 융착(融着)되어 있고 맑은 황갈색을 아주 엷게 띠는 투명유(透明釉)이다. 입술부분(口緣部) 일부를 수리하였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출처:문화재청>


부채모양 필가 (붓 꽂는 그릇), 묵호(먹물담는 항아리), 조선 19세기.


사자모양 도장, 조선 18~19세기


매화 대나무 괴석무늬 연적, 조선 19세기. 조선시대에 실생활에 가장 많이 사용했고, 지금도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백자는 아마도 서예에서 사용했던 연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모양에 특별한 기준이 없이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것들이 오늘날 많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인다.


대나무무늬 연적


구름 용무늬 연적, 19세기


생황모양 연적, 19세기


매화무늬 병, 18세기


난초무늬 항아리, 18세기


모란넝쿨무늬 항아리, 보물 240호. 조선 백자는 단순하고 간결한 특징이 있지만 이 항아리는 이례적으로 복잡한 투각무늬가 장식되었다. 무늬로 새긴 정교한 수법과 백자의 우수한 질로 미루어, 왕실의 중요한 의례나 행사를 위하여 특별히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몸체를 뚫을새김한 높이 26.7㎝, 아가리 지름 14.25㎝의 백자 항아리이다. 반듯한 아가리에 어깨에서부터 급히 벌어졌다가 서서히 좁아진 모습으로 내·외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안쪽 항아리는 문양이 없으며, 바깥 항아리는 표면을 뚫어서 조각하는 기법으로, 몸체 전면에 활짝 핀 모란과 줄기와 잎을 표현하였다. 어깨부분에는 청화로 덩굴무늬를, 허리 밑부분에는 꽃무늬 띠를 도들새김하였다. 원래 꽃병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바깥 항아리는 일반적인 조선 항아리가 지니는 전형적인 곡선이 있다. 항아리 전체에 새긴 모란꽃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전체 형태는 대범하면서도 은근한 세련미를 풍긴다. 유약은 담청을 머금은 백자유로,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가마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통들에 다양하게 뚫을새김한 모란무늬나 물결무늬들로 미루어 1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출처:문화재청>


매화 새무늬 항아리, 조선 18세기


국화 모란무늬 합, 조선 19세기


<수복>무늬 큰 사발, 19세기


장생무늬 병, 19세기


장생무늬 항아리, 19세기


격자무늬 접시, 19세기


불수감무늬 접시, 19세기


<수복>무늬 병, 19세기

조선백자
백자와 분청사기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가 약 150년 간 제작된 데 비해 백자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꾸준히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다. 순수와 절제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백자는 유교이념을 추구한 새 왕조와 사대부층이 애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과 취향을 담고 있다. 조선 백자의 역사는 왕실과 중앙 관청용 백자를 제작한 가마인 관요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관요는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사옹원 소속의 분원을 말하는 것으로, 분원 간요의 설치와 운영에 따라 크게 초기.전기.중기.후기로 구분된다. 초기는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지 않은 시기로, 전국의 가마에서 제작된 최고급 백자를 왕실과 중앙관청에서 사용하였다. 전기는 세조 말 예종초 분원 관요가 설치된 뒤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로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등을 관요에서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중기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분원 관요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는 1752년 이전까지이다. 17세기에는 전쟁으로 백자의 질이 떨어져 회백색 백자가 만들어졌다. 또 안료가 부족하여 청화백자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은 대신 안료를 구하기 쉬운 철화백자가 유행하게 되었다. 17세기 말부터는 백자의 질이 다시 나아져 눈처럼 하얀 백자가 제작되었으며, 한국적 정서가 담긴 청화백자도 많이 만들어졌다. 후기는 1752년부터 분원관요가 민영화되는 1884년까지이다. 이시기에는 순백자를 비롯하여 청화백자, 동화백자, 철화백자, 청색과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그려진 백자 등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 백자의 중심, 분원 관요
세종 때부터 왕이 사용하는 그릇이 '어기'로 백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조선 왕실에서는 많은 양의 백자가 필요했다. 또한 세조 때부터는 청화백자를 제작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이를 토대로 세조 말에서 예종 초인 1467년 무렵 사옹원에 소속된 분원이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어 왕실용 백자를 만드는 관요 역할을 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백자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바탕흙인 광주토와 땔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수도인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한강을 이용하여 완성된 백자를 왕실로 편리하게 운반할 수 있었다. 이처럼 광주는 도자기 생산지로서 가장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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