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한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99칸 중부지방 양반가 대저택이다. 이 가옥은 19세기에 수원 화성내에 지어졌던 것을 한국민속촌을 조성하면서 옮겨진 건물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구한말 상류층 사회의 호화로운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근검을 강조하던 조선사회가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저택이다. 이 저택의 규모는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이나,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보다 넓고 건물칸수도 많은 것으로 보이며, 궁궐 건물에서 사용했던 건물을 연결하는 복도를 설치하는 등 당대 최고의 호화주택을 만들려고 했던 의지가 여러곳에서 보인다. 사회질서가 안정적이던 영.정조때까지는 이런 규모의 건물을 짓기는 쉽지 않았지만 사회질서가 붕괴된 19세기 세도정치 기간동안에 전국적으로 많은 호화주택이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저택은 그런 집들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 저택은 상당히 넓은 부지위에 솟을대문, 줄행랑, 바깥사랑, 안행랑, 내당, 초당, 내별당, 큰사랑, 외별당, 사당 등의 건물을 배치하고 있는데, 이는 안동 하회마을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고위관료를 지냈던 인사들의 저택들 보다도 훨씬 넓고 많은 건물들을 두고 있다. 비슷한 유형의 주택으로는 서울 안국동의 윤보선 전대통령이 살았던 99칸 저택, 강릉의 선교장 등을 들 수 있는데, 같은 99칸 저택이라고 하더라도 훨씬 넓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강릉 선교장은 동해안 유람을 나섰던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한 사랑채 위주의 구성인데 비해서 이 저택은 손님을 위한 공간보다는 이 저택 주인 가족들과 하인들을 위한 공간 위주로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다. 조선후기부터 시작된 장자상속과 토지의 집중화와 소작제로 경제력을 크게 확대한 계층의 생활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99칸에 이르는 주택의 규모로 보아서는 집안을 돌보는 상당히 많은 하인들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주택내 설치된 정자와 정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부지방 양반가
99칸 집이라 부르는 이 가옥은 1861년(철종12년) 수원 화성 내에 지어졌던 것을 1973년에 원형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솟을대문, 줄행랑, 바깥사랑, 안행랑, 안사랑, 내당, 초당, 내별당, 큰사랑, 외별당, 사당 등 유교사회에 있어서 큰 집 살림에 필요한 모든 공간이 규모있게 갖추어진 전형적인 대가이다. 건물 전체에 마루 공간이 많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굴뚝을 건물에서 떨어져 설비하여 난방의 효율과 함께 조형미를 살린 점 등 전형적인 중부지방 상류층 가옥의 형식이다. <출처:한국민속촌>
이 저택의 출입문이 솟을대문. 대문 양쪽으로는 관아 건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긴 행랑채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 솟을대문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위직을 지내야만 하는데, 사회질서가 문란해진 19세기 이후에 지은 저택의 솟을대문은 주인의 경제력이 더 큰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솟을대문과 연결된 행랑채는 관아 건물을 연상시키는 규모이다.
행랑 및 바깥사랑
행랑은 대문과 연결되어 집안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하인들의 생활 공간으로, 마굿간을 비롯하여 마부방, 화장실, 하인방과 부엌, 곳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사랑은 손님이 머물거나 유숙하는 곳으로, 사랑채를 사용할 때 공간 부족으로 인한 불편을 더는 기능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출처:한국민속촌>
솟을대문 옆으로 있는 바깥행랑채는 주로 마굿간, 광, 부엌 등으로 사용하는 건물이지만 관아 건물처럼 제대로 만들어 놓고 있다.
솟을대문 옆에 있는 마굿간
바깥행랑채에 있는 부엌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손님들이 숙식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 바깥사랑이 있고, 내행랑과 바깥행랑 사이에 넓은 마당이 있다. 이 곳에서 전통혼례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행랑채들이 있는 마당 한편에는 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인 바깥사랑이 있다. 바깥사랑은 앞면 5칸 규모의 '-'형 건물로 가운데 2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관광객들이 많은 경포호수에 위치한 선교장은 같은 99칸의 주택이지만 손님들을 묵을 수 있는 사랑채가 상당히 많은데 비해서 수원화성에 있었던 이 저택은 방 수가 그리 많지는 않다. 주로 일가 친척들이 묵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깥사랑 대청마루. 손님들과 환담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바깥사랑에 있는 방.
바깥사랑 옆으로는 이 저택의 주인이 주로 머물던 공간인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바깥사랑 뒷편으로 막혀 있는 구조로 대청마루에만 문을 달아 놓고 있는데 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행랑채 쪽으로는 광을 두고 있는데 주로 술독이나 쌀 등을 보관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으로 남자주인이 집안에서 일상적인 생활과 자녀의 교육을 위한 사회적 공간이다. 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인 큰 방과 건넌방이 있다. 큰 방 아래는 복도를 통해 마루방으로 된 서고가 달려 있으며, 옆에 상노가 거처하는 작은 온돌방이 있다. <출처:한국민속촌>
이 저택의 주인이 주로 머물던 공간인 사랑채이다. 'ㄱ'자형 건물로 앞면 6칸에 3칸짜리 날개채를 달아 놓고 있다. 가운데 큰 대청을 두고, 이 집 주인이 손님을 맞는 사랑방과 누마루, 자녀들이 공부를 하던 방과 서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집 남자들의 일상생활이 주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3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집 남자 식구들이 사용했던 방으로 보인다.
사랑채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가 있는데 주로 집안행사를 하던 장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좌.우에 있는 방문을 열어두면 상당히 넓은 공간이 만들어진다.
사랑방 내부의 모습. 이 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대청마루 오른편으로는 누마루와 사랑방이 있다. 이 곳에서 자녀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데, 주택의 구조로 보아서는 이 방에서 주로 손님을 맞았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대청마루 반대편 방에는 주인이 일상생활을 하는 서재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방에서는 이집 자녀가 공부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가정교사를 불러서 교육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주택에서 크게 유행했던 누마루가 사랑채 끝쪽에 만들어져 있다. 누마루는 주택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3면에 문을 설치하여 정자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여름한철을 보내기 좋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사랭채 전경. 3면이 시원하게 뚫린 누마루가 인상적이다.
사랑채는 안채인 내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에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복도가 많이 설치되었는데 궁궐복도를 모방해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안사랑 및 안행랑
안사랑은 살림을 물려준 노모나 자녀들이 생활하는 곳이며, 안행랑은 여자하인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유모나 침모, 찬모 등이 함께 생활 한다. 안채와 연결 된 '-'자형 구조로 넓은 대청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부엌이 별도 설치되어 있고, 안 행랑채와 연결되어 곳간이나 광을 두루 갖추고 있어 곡식이나 여러가지 생활 도구를 보관하도록 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속촌>
이 집은 바깥사랑채와 내당인 안채를 구분하는 행랑채를 두고 있다. 행랑채에는 집안일을 봐주던 여자하인들이 주로 기거했던 공간으로 이 또한 관아 건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큰 규모이다.
안행랑 출입문을 들어서면 한쪽편에 안사랑이 있고, 안행랑과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궁궐 전각을 연상시키는 건물 구조를 하고 있다.
안행랑채 또한 출입문을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칸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인들이 머물던 방과 창고,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안사랑은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행랑채, 내당, 바깥사랑과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가운데 2칸짜리 큰 대청마루를 두고, 그 양쪽에 방을 있다. 안사랑은 노모나 결혼한 자식이 살던 공간으로 보인다. 안채인 내당, 사랑채와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안사랑 대청마루.
내당과 안사랑을 연결해 주는 복도.
마당 한쪽편에 있는 장독대
내당
이곳은 안주인을 비롯한 여자들의 일상생활공간으로 손님을 맞이하거나, 학문수양 및 자녀교육, 여가생활 등을 하는 여자들의 사회문화적 활동이 이뤄지는 곳이다. 중부지방 특유의 'ㄱ'자형을 기본으로 안방 뒤편으로 윗방을 달아낸 형태이다.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큰 안방과 여러개의 윗방, 건넌방이 있고 가장 오른쪽에 부엌을 두었다. 내외문과 중문을 통하지 않고 사랑채로 갈 수 있는 회랑과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출처:한국민속촌>
이 저택의 중심이 되는 안주인이 거처하던 내당이라고 부르는 안채이다. 'ㄱ'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큰 부엌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99칸 저택의 규모에 비해서 대청마루를 크게 두고 있지는 않다. 이는 안사랑, 바깥사랑, 사랑채 등에 큰 대청마루가 있는 공간이 많아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이집 여자들이 주로 생활만 하던 공간으로 건물규모는 가옥 전체의 규모에 비해서 크지는 않다.
2칸 규모의 내당 대청마루. 보통 집안 제사를 안채에서 지내기때문에 양반가옥의 경우 대청마루를 크게 하고, 안채의 구조는 집안행사를 고려한 경우가 많은데, 이 저택의 경우 그런 기능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안방 앞에는 약간 높게 설치한 난간이 있는 툇마루가 있다. 누마루처럼 여자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구한말 한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내당의 부엌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며 부엌 윗쪽에 다락방을 만들어 놓고 있다.
안방에서 여자들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뒷편에서 본 내당
내당 뒷편에는 내별당이 있고, 안사랑과 사랑채로 연결되는 복도가 있다. 궁궐건물과 마찬가지로 뒷편 공간은 이집 여자들이 자유롭게 지내는 공간으로 문을 많이 달아 놓고 있다. 툇마루에 앉아서 쉴 수 있는 후원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사랑과 연결해주는 복도
구운벽돌로 세련되게 만들어진 굴뚝. 이 또한 궁궐 건물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뒷마당 연못
내 별당
내 별당은 내당 뒤편 조용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내당의 번거로움이나 공간의 부족 같은 일이 있을 때에 대비해서 내당 마님이나 그 손님, 아녀자들이 각별히 이용하기 위해 마련된 집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이 집 뒷편에는 초가를 얹어놓은 내별당이 있다. 내별당은 이집 안주인을 위한 공간으로 안주인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용도보다는 안주인 친정식구를 비롯하여 일가친척이 방문했을 때 머물 수 있도록 만든 공간으로 보인다. 그래서 안주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별당을 만들었던 것 같다.
초가건물이지만 앞면 5칸의 작지 않은 규모의 건물로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안초당
안초당은 결혼하기 전 딸들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학문을 하거나, 서예, 자수 등을 하면서 신부로서 갖춰야 할 심신을 수양하는 곳이다. 주로 내당 후원 조용한 곳에 위치하며 대청과 방으로만 구성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모든 건물이 기와지붕인 반면 이엉으로 되어 있어 초당이라 한다. <출처:한국민속촌>
한초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작지 않은 건물로 결혼하기전 딸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초당내부에서 딸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초당 마당에서 본 안채.
초당에는 작은 연못과 정원을 만들어 놓고 있다.
사당
사당은 조상의 신위를 모셔 놓은 집안에서 가장 신성스러운 공간으로 위치가 일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집안의 정침인 안방 후원에 위치한다. 어느 집안을 막론하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정한 규격으로 건립된다. 사당에는 종손을 기준으로 위로 4대까지 양주신위를 모시며 돌아가신 날 제사를 지낼 때 여기에 모셔진 신위를 제상에 모시고 지낸다. <출처:한국민속촌>
사당은 불천위 조상의 위패를 놓고 조석으로 제를 올리는 공간인데, 이 집 사당에 대한 설명에는 불천위 조상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임의로 만들었던 사당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당은 앞면 3칸으로 일반적이 사당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외별당
외별당은 남성들의 공간으로 사랑채의 담장 밖에 위치하며 일각문을 통해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ㄱ'자형의 마루중심의 집이며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외별당은 특별한 손님을 접대하거나 모임, 풍류를 즐길 때 사용하던 곳으로 주인의 사회문화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연못과 정자가 부설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속촌>
이 저택의 한쪽편에는 넓은 정원과 외별당이라고 부르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별당이라기 보다는 명승지에 지어진 정자 건물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건물로, 이 집 주인이 손님들을 불러서 연회를 벌리는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엄청난 부자이기때문에 이름난 기생이나 소릿꾼을 불러서 잔치를 벌리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집 안채와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외별당을 중심으로 넓은 정원과 연못을 꾸며놓고 있다. 건물은 'ㄱ'자형으로 앞면 6칸의 건물 앞쪽으로 누마루를 달아 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석재 기둥에 얹어 놓은 누마루는 3면이 뚫어진 공간으로 정자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건물 내부는 방으로 된 왼쪽편 2칸을 제외하고는 마루가 깔려 있다.
서원이나 향교의 강당보다도 더 덟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연회를 즐길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뒷편에는 단을 높여서 기생이나 소리꾼이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재현해 놓은 장면에도 기생으로 보이는 인물이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다.
누마루가 있는 공간 또한 상당히 넓다. 이 정도의 공간이면 100명 가까운 인원이 참여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라고 생각된다. 관아에서 연회를 위해 설치된 정자보다도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아 보인다.
방 앞쪽에도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설치해 놓고 있다.
외별당 앞 정원에 있는 연못. 조선시대에는 사각형 연못을 파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곳에는 원형으로 우물을 파놓고 있다. 원래 주인이 의도적으로 원형 연못을 만들었는지, 아니면 민속촌으로 옮기면서 만든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형태이다.
연못 옆에 있는 작은 정자
뒷쪽에서 본 외별당.
외별당 뒷편으로는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놓고 있다.
뒷편 정원에 있는 작은 정자
이 저택 외별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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