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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동남부 작은 도시에서 출발한 경주는 신라 천년 왕국의 심장이 되는 도시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국가의 수도로 존재했던 도시이다. 세계적으로도 천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도시는 그리 많지는 않다. 신라의 흔적은 삼국시대의 고분과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에 세워진 수 많은 사찰 등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고분의 나라', '황금의 나라', '불교의 나라' 등 신라를 수식하는 많은 말들에서 신라는 경주를 지칭하고 있다. 오랜 세월동안 한 왕국의 수도였던 경주는 한반도 문화유산의 보고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곳에서는 누구나 신라인의 흔적을 몸으로 느끼면서 화려했던 옛 도시의 발자취를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경주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수많은 고분에서 출토된 화려한 유물들을 통해서, 금관을 비롯하여 화려했던 그들의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조성된 불국사, 석굴암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에서 그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경제력 등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사찰 건축에 많은 공을 들여서인지, 일상 생활과 관련된 유물들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통일신라인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을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볼 수 있게 된 것은 신라 왕궁인 월성의 후원에 해당하는 안압지라고도 불리는 임해전지의 연못속에 빠졌던 여러가지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일 것이다. 임해전지에는 신라인이 생활에 사용했던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어 당시 그들의 생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임해전지에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은 경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으며, 중앙박물관에서는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일부만을 전시하고 있다.

신라왕경
신라의 왕경인 경주는 원래 신라 6부가 자리하던 곳으로, 지방도시인 소경과 비교하여 대경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6~7세기에 왕경에 살던 신라인들은 자신들을 신라 6부의 주민으로 인식하여 지방에 살던 주민들과 구분하기도 하였다. 신라 왕경은 발굴조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6세기 초반 바둑판 형태의 도로망 구축을 통한 도시계획을 시작하여, 8세기 경에는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최근 황룡사지 동쪽의 왕경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왕경내부의 가옥.담장.우물.배수구.도로 등이 확인되어 왕경의 구조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왕경의 구체적인 범위는 기록의 내용과 발굴내용에 차이가 있어 정확한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도로유구의 조사결과로 남북 6km, 동서 5.5km 내의 현 경주 시가지를 중심한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왕경의 도로
왕경에 있는 궁궐과 집들은 남북으로 촘촘히 짜여진 도로망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경주 왕경의 도로는 대부분 6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5~10cm 정도의 자갈을 깐 후 점토와 사질토 등을 섞어서 도로면을 평탄하게 만들고 양쪽에 배수로를 두는 구조이다. 도로의 너비는 5~16m로 다양한 데, 가장 규모가 큰 경우는 23.7m에 이르기도 한다. 도로면에서 확인되는 수레바퀴자국은 너비에 따라 크게 70~110cm과 160~200cm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이로 보아 신라 왕경의 도로는 여러대의 수레가 동시에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료제와 토용
삼국 통일 이후에 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아였다. 이전에는 왕경인과 지방민에게 각각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으나, 통일 후에는 동일한 벼슬을 주었다. 이 시기에는 율령에 기초하여 국가기구를 조직하였고 이를 위해 국학 등의 교육기관도 정비되었다. 관료제의 정비는 중국 문화와 복식의 수용으로 엿 볼 수 있다. 당나라에 간 김춘추가 당의 복식을 받아 들여 진덕여왕 3년(649)부터 당나라식 관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복식은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과 허리띠장식에서 잘 알 수 있다.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 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문관상, 8세기, 경주 용강동 출토된 것으로 신라시대 관료의 복식을 잘 보여주고있다. 신라는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한 이래로 당나라의 복식을 도입하였다고 한다.


여인상, 8시기, 경주에서 출토된 것으로 상류층 여자들의 복식을 보여주고 있다.

왕경의 정비
삼국통일 후에 신라는 수도 금성을 금경, 대경이라 부르고 지방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수도인 왕경을 지방과 구별하여 불렀으며, 도지 구조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갔다. 새로이 정비된 왕경을 둘러싸고 산성을 수축하여 왕경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신라 왕경의 정비는 5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이루어져 왔으며, 신라 도성의 형성과정은 경주분지 내 평지의 개발과 짝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경주분지 내외 왕경은 격자형 가로망을 질서정연하게 구획하여 방리를 설정하였고 각 방리는 도로를 통해 구획되었다. 왕경은 궁궐이 있던 월성을 중심으로 관아, 귀족의 저택인 금입택, 원기, 사찰 등을 배치하여 고대 도시를 완성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심용왕'명토기, 경주 안압지


'경사'명 벼루, 경주 안압지


은.청동 허리띠 장식, 경주 구정동 방형분


청동 허리띠, 경주 장군로


도장, 경주


성덕대왕신종 탁본, 771년경


'남궁지인'명 기와(경주 월성 출토), '재성'명 암키와(경주 안압지 출토)


목간, 8세기, 경주 안압지


'세택'명 토기, 경주 안압지


금동 용머리, 경주 안압지


금동 사자무늬 문고리와 금동 옷걸이,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건물이나 가구에 사용했던 장식으로 보이며, 조선시대 한옥에 비해서도 수준높은 생활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짐승얼굴무늬 기와, 8세기, 경주 안압지 출토. 짐승얼굴을 한 기와는 악귀의 침입을 막아내려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사용하였다. 도깨비무늬 기와로도 불린다. 대표적인 도끼비 문양이다.


보상화무늬 전돌, 경주 안압지


금동 연꽃모양 꾸미개,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구 등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 주사위(복제품),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주령구라고 불린다. 실제 출토된 원본은 당시 실무자의 관리부실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유물출토 관련하여 중요한 에피소드를 남긴 유물이다.


주령구 사용방법


청동 무덤 문고리


금동 장식구


성덕대왕 신종 탁본, 771년경


뼈단지, 국보 125호, 화강석을 깍아 만든 합에 넣은 뼈 단지이다. 통일신라 녹유토기 가운데 빛깔이 곱고 화려한 걸작품이다.


벼단지를 보관했던 화강석으로 만든 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