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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고고관] 금관총 출토 유물, 금관총 발굴 90주년 기념 특별전

younghwan 2011. 10. 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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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도심 노서동에 위치한 노서동 고분군은 월성 북쪽이 넓은 평야에 자리잡고 있는 마립간시기에 김씨 귀족층의 무덤으로 보이는 대릉원 주변 고분들 중에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고분이다. 이 지역 고분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신라 특유의 무덤양식으로 하고 있는에 나무로 넓은 고간을 만들어 그 안에 주검과 껴묻거리를 넣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오린뒤 흙을 덮은 구조로 도굴이 상대적으로 어려워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큰 무덤은 높이가 22m로 봉분의 규모가 이전이나 이후의 고분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이다. 노서동과 노동동은 도심과 가까이 있었기때문에 이른 시기에 개발이 이루어졌으며, 대표적으로 금관총과 서봉총 등이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되어 있다.

 그 중 금관총은 지금으로 부터 90년전인 1921년에 발굴조사되었는데,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무덤이다. 이 지역에서 주택공사를 하기 위해서 언덕의 흙을 사용했는데, 금관으로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경주박물관에서는 금관총 발굴 90주년을 기념의 출토유물들을 특별전시회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금관총은 봉분 밑지름이 48m, 높이 13m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금은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파헤쳐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금관총은 내부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헤 시신을 넣은 목관을 안채했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목걸이, 금제 허리띠, 팔찌, 금반지 등으로 치장했다. 머리 윗쪽에 부장품 상자 속에는 각종 그릇,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이 껴묻거리로 묻어두고 있다.

돌을 쌓아 큰 무덤을 만들다.
4세기에 들어서면 신라만의 독특한 무덤이 생겨납니다.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나무로 방처럼 넓은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주검과 부장품을 넣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뒤 흙을 덮은 구조의 무덤입니다. 가장 큰 무덤은 높이가 22m로 지금의 7층 건물 정도로 높습니다. 이렇게 큰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허리띠 같은 화려한 금제품이 많이 출토됩니다. 왕처럼 최고 신분의 사람들을 위해 축조한 무덤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구조의 무덤이 멀리 시베리아의 파지리크에서도 확인되어 두 지역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 시기부터 있던 덧널무덤에 주변 지역 묘제의 영향을 받아 신라인들이 새롭게 만든 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출처:경주박물관>



금관총 목관내 출토품. 금관총은 목재를 덧널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목관에 넣어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그 위에 흙을 쌓은 신라특유의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을 하고 있다. 금관총 시신이 안치된 목관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허리띠, 반지, 목걸이, 팔찌등 금으로 만든 다수의 귀중품으로 장식을 하고 있다.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 국보 87호로 지정된 금관총 금관은 최초로 발견된 금관으로 높이 44.4cm, 머리띠 지름 19cm로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금관 전형적인 신라금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띠 정면에 3단을 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에는 2개의 사슴뿔모양의 장식이 세워졍 있다. 각 장식에는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금실에 매달려 있다.


금관을 장식하고 있는 3단으로 된 山자 모양의 장식.

금관총 금관 및 금제관식 (국보 87호)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금관으로, 높이 44.4㎝, 머리띠 지름 19㎝이다.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출(出)’자 모양의 장식 3개를 두고, 뒤쪽 좌우에 2개의 사슴뿔모양 장식이 세워져 있다. 머리띠와 ‘출(出)’자 장식 주위에는 점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옥과 구슬모양의 장식들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양 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으로 된 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줄 끝에는 비취색 옥이 달려 있다. 이 같은 외관(外冠)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棺) 밖에서 발견되었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새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금관은 기본 형태나 기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할 만한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가슴걸이. 신라 고분에서 금관과 같이 출토되고 있는데 구슬로 가슴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허리띠(국보 88호), 국보 88호로 지정된 금관총 금제 허리띠이다. 금제허리띠는 과대라 불리는 허리띠와 요패라고 불리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하며, 신라인은 옥과 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말을 타고 다니던 유목민은 생활습관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허리띠에 달아서 늘어뜨린 장식으로 물고기 모양작싱, 작은 병처럼 생긴 장식등 다양한 형태의 장식을 늘어뜨리고 있다.


금관총 금제 허리띠.

금관총 금제 허리띠 (국보 88호)
과대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를 말하며, 요패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옛날 사람들은 허리띠에 옥(玉)같은 장식품과 작은칼, 약상자, 숫돌, 부싯돌, 족집게 등 일상도구를 매달았는데, 이를 관복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나 신라에서는 관직이나 신분에 따라 재료, 색, 수를 달리하여 그 등급을 상징하였다. 경북 경주시 노서동 소재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금제 과대 및 요패는 과대길이 109㎝, 요패길이 54.4㎝이다. 과대는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양끝에 허리띠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인 교구를 달았으며, 과판에는 금실을 이용하여 원형장식을 달았다.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장식물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지만, 크고 긴 것을 가장자리에 달았다. 금관총 과대 및 요패는 무늬를 뚫어서 조각한 수법이 매우 정교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대롱옥, 장식으로 매달던 옥으로 보인다.
 

금제팔찌


금귀걸이와 구슬


금제반지,


신발


금관총 금관이 출토될 당시 유물이 놓여있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금관총 부장궤 출토품


새날개모양금관식(국보87호), 금관총 금관의 내관에 해당하는 관모와 관장식은 목관 밖 껴묻거리를 보관하던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 새날개 모양을 한 관모의 장식이다. 세베리아 계통의 삼국시대 사람의 신앙과 관련된 샤머니즘과 관련된 상징으로 보고 있다.


 금제귀걸이


금제장식구


금동제 뿔잔. 금관총에서도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인 청동으로 만든 각배가 출토되고 있다.


한반도인 무기인 환두대도.


금동제 신말


솟을장식을 비롯한 말에 달았던 장식들로 보인다.


청동제 방울


목걸이, 곱은옥,  금제귀걸이, 금제 장식구,


투구복말을 비롯한 금동제 장식구로 갑옷을 장식하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제 고배, 금제완, 금동제합, 유리제 용기. 금관총에서도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유리로 만든 그릇이 출토되고 있다.


뚜껑접시와 손잡이 항아리


짧은목항아리


장군


경주 노서동 공원에 남아 있는 금관총.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를 해서 그런지 봉분을 원상복구하지 않고, 훼손된채 방치해 두고 있다. 금관총 유물이 발굴된 자리는 지금은 도심공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90년전, 1921년 9월이었습니다. 경주의 중심가였던 노서동에서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집터를 고르며 낮은 곳을 돋우는데에 주변에 나지막한 '언덕'에서 파내온 흙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 흙속에서 작은 유리구슬들을 발견하여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지나가던 순사가 이를 보았고, 흙이 파여진 언덕에서 유물이 노출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언덕이 바로 신라 금관이 처음 출토된 '금관총'이었습니다. 금관이 나왔다 하여 금관총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발견되자마자 경주보통학교장 등이 금관 등 부장품을 임으로 수습하고 맙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한 정식 조사를 거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신라금관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습니다. 금관총 출토품은 서울의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져 정리되었으며, 이후 경주로 다시 돌아오게 되며 금관을 보관 전시하기 위해 금관고라는 건물을 지었습니다. "  <출처:경주박물관>

금관이 나온 신라 능묘
금관총은 금관이 발견된 최초의 신라능묘입니다. 신라금관은 지금까지 모두 6점이 발굴 또는 발견되었습니다. 1921년 금관총에서 금관이 출토된 뒤,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에서 연이어 발굴되었습니다. 광복 뒤 1973년 천마총에서, 1974년 황남대총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이 외에 경주 교동에서 1978년 초기 형태의 금관이 발견되었습니다. 금관이 발굴된 무덤은 모두 경주의 대릉원 일대에 분포한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입니다. 금관의 주인은 왕뿐만 아니라 왕족도 해당됩니다. 여성도 금관을 소유했으며, 황남대총(북분)이 대표적입니다. 서봉총과 금관총의 주인을 여성으로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금관총은 봉분의 밑지름이 48m, 높이가 13m 정도로 추정됩니다. 매우 큰 무덤이었습니다. 내부에는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목관에 안치했습니다. 목관의 크기는 약 2.5m x 1m 로 추정됩니다. 묻힌 이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목걸이, 금제 허리띠, 팔찌, 금반지 등으로 치장했습니다. 머리는 동쪽으로 두었습니다. 머리 위쪽의 부장품 상자 속에는 각종 그릇,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 많은 보물을 넣었습니다. 금관총은 1천5백여 년전인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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