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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시대 금속화폐와 일상속 상류층 문화

younghwan 2012. 2. 10.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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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에는 절제와 소박함을 강조하던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도 화려함과 세련된 문화를 향유한 사회였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색감과 형태의 고려청자를 비롯하여 물그릇으로 사용한 정병, 화려한 재질로 만들어진 생활용품 등이 남아 당시 지배층의 화려했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중국 송나라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거래가 있었던 시기로 신안 앞바다 등에서 발굴된 유물들에서도 알수 있듯이 도자기를 중심으로 송나라, 일본 등과 활발했던 무역활동을 엿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태안 앞바다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당시 강진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들이 고려의 수도이 개경으로 운송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역거래가 활발했던 당시 사회를 반영하여 송나라에 유학했던 대각국사 의천의 주장으로 해동통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삼한중보 등 금속화폐를 발행하여 화폐의 유통을 촉진하기도 했다.

 
금속화폐
고려시대의 기본 화폐는 쌀.베 등의 물품화폐였으나, 표준화된 금속화폐도 몇 차례 주조.유통되었다. 최초의 금속화폐는 성종 15년(996)에 주조된 건원중보라는 철전인데, 강력한 반대론에 부딪혀 약 6년만에 유통이 중단되었다. 한편 숙종 때에는 은병(은1근)이라는 고액화폐와 해동통보 등의 동전들도 주조.유통되었다. 동전 유통 정책은 승려 의천의 건의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의 상업 발달 속에서 물품 화폐에 의존하던 문벌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존 물품화폐가 제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동전은 그리 오래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의 동전, 해동통보(고려 숙종 7년,1102년)와 동국통보(12세기)
해동통보는 고려 제15대 왕 숙종의 명으로 주조.발행한 동전이다. 앞면에 "해동통보"라고 새겼고, 뒷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 고려 정부는 이 해에 해동통보 15,000관을 문무 양반 관리와 군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점 등을 개설하여 이르르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등 동전의 유통에 힘썼다. "해동"은 우리나라를 뜻한다. 동국통보는 고려 숙종 때 해동통보와 비슷한 시기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동전이다. "동국"은 우리나라를 뜻한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의 동전 삼한통보와 삼한중보, 12세기
고려 숙종 때 해동통보와 비슷한 시기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동전들이다. 앞면에 "삼한통보" 또는 "삼한중보"라 새겼고, 뒤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 "삼한"은 우리나를 뜻하며 "중보"는 앞서 주조한 동전을 다시 발행할 때 흔히 붙이는 이름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금속화폐 사용을 주장한 의천의 초상화(대각국사 의천초상, 복제품), 보물 1044호, 순조5년(1905), 도일비구 그림, 선암사 소장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의 초상화이다. 의천은 고려 15대왕 숙종의 친동생으로 '교장'의 간행과 천태종의 창시를 통해 고려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송나라 유학 당시의 견문을 바탕으로 금속화폐의 이점을 조목조목 주장하여 숙종의 금속화폐 정책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의 주전론은 그의 문집인 '대각국사 문집에 전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의천이 주장한 동전사용의 이로움
전錢을 쓰면 운반하는 고통을 면할 수 있는 것이 그 이로움의 첫째이며, 간교한 협잡질을 근절하여 곤궁한 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이 그 이로움의 둘째이며, 녹봉의 절반을 전으로 지급하면 (농민들에게 녹봉미를 바치라는) 독촉을 줄이고 흉년에 대비할 수 있으며, 권세 있는 자를 누르고 청렴결백한 관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이 그 이로움의 셋째이며, ..  - 대각국사문집 중 - <출처:중앙박물관>

도량형
고려시대에는 일찍부터 국가가 도량형을 정비하고 관리하였다. (1040년, 1046년) 이는 미곡 등의 조세와 금.은.구리.철.소금 등 공물의 수취에 정확성을 기하고, 물품의 가치 기준을 명확히 하여 상품유통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고려시대 도량형기의 실물은 전하는 것이 드물어 구체적인 형태나 규격을 잘 알 수 없는데, 근래에 청주 사뇌사 터에서 출토된 청동기름말 같은 유물이 도량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청에서 승인한 기름말(유두), 고려, 청주 사직동 사뇌사지 출토
고려시대 청주목의 사뇌사에서 기름 양을 측정하는 데에 쓰던 그릇이다. 옆면의 명문에는 청주목의 관리들이 이 기름말을 공인한 사실이 수결과 함께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기름말은 목牧 차원에서 공사의 저울과 섬.말.되.평미래를 검사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확인해 주는 실물자료라 할 수 있다. 안쪽 면에 새긴 선까지의 용량이 2,500cc이고 전체 용량은 5,000cc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일상속의 상류층 문화
고려시대에는 절제와 담박함이라는 유교적 가치가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배층의 생활 도구에서는 실용성이나 소박함보다 다채로움과 세련됨이 돋보인다. 빛깔과 질감이 좋은 청자가 많이 사용된 것도 그러한 시대 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반 물그릇으로 사용한 정병, 호사스러운 재질의 장도, 향합, 침통들도 당시 지배층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생활도구들이다. 활쏘기, 말타기,거문고 연주 등과 함께 교양 있는 여가 활동으로 여겨지던 바둑도 상류층의 여유로운 일상을 대변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풀꽃무늬 꽃모양 받침잔(청자 음각 조화문 화형 탁잔), 12세기
꽃잎 모양의 청자 잔과 청자 받침이다. 모란무늬, 넝쿨무늬, 국화무늬, 연꽃무늬 등을 음각하였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추정되는 명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석류모양 연적(청자 석류형 연적), 12세기, 개성출토
출토지인 수도 개경의 상류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청자연적이다. 탐스럽게 과장된 석류를 얼싸안고 있는 것은 원숭이인데, 그 벌어진 입으로 물을 따르게 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자 조롱박 모양 주전자(청자표주형주자), 고려
변형된 조롱박 모양의 청자 주전자로, 손잡이와 귀때부리의 선이 차분하다. 몸체에는 가느다란 음각선으로 연잎 무늬를 반양각하였으며, 뚜껑은 끝이 갈라진 연잎을 음각선으로 표현하였다. 차분한 비색 유약을 입혔다. <출처:중앙박물관>

상류층의 오락, 바둑
바둑 두기는 거문고 타기와 활쏘기, 말타기 등과 더불어 고려시대 상류층의 필수 교양이었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문집'에는 바둑관련 시가 있는데 대나무와 꽃을 배경으로 바둑과 술잔을 기울이던 고려시대 상류층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주사위(납석제주사위.청자상감주사위)와 바둑알(기석), 개성출토

부잣집의 청동물병
정병은 목이 긴 형태의 물병으로 원래 종교적 의물이었다. 가장 깨끗한 물을 담는데, 깨끗한 물은 사람드의 목마름과 고통을 씻어 준다고 생각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사찰 뿐만 아니라 도교사원, 관청 등에서 두루 사용하였고 부잣집에서는 생활용품으로도 사용하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는 귀부인을 묘사하면서 부잣집에서 정병을 쓰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귀부인의 화장은 향유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 부잣집에서는 큰 자리를 깔고서 시비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과 정병을 들고 있는데 더욱 더운날이라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동물병(청동정병), 고려, 부여 부소산 출토


은으로 만든 약그릇(약제 약합), 은으로 만든 장도집(은제 장도집, 12~13세기), 은에 금을 입힌 침통(은제 금도금 침봉,개성출토), 금을 입힌 은합(은제금도금합, 12세기, 개성출토), 금동으로 만든 장도집(금동제 장도초, 12~13세기)

바다에서 건져올린 고려인의 삶
서해안은 개경으로 통하는 바닷길이었다. 바다와 강을 이어 국내물류는 물론 국제교역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러한 당시의 바닷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최근 태안이나 비안도 등 서해안 연안에서 고려시대 난파선이 발굴되었다. 건져 올린 여러 유물을 통해 고려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된다. 강진에서 대량생산된 청자들은 운반하기 쉽도록 수십 개 단위로 포장되어 뱃길을 따라 개경에 공급되었으며, 운반선의 선원들은 석탄을 이용하여 조나 메밀을 조리해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석탄, 조와 메밀, 1208년,  태안 앞바다.
선원들의 식사, 태안 앞바다 발굴품 가운데는 석탄, 조와 메밀이 있다. 조와 메밀은 선원들의 식량이었을 것이다. 석탄은 이들 식량을 익혀 먹는데 연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선상의 식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짐꼬리표 목간(목간, 복제품), 1208년, 태안앞바다
태안의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의 꼬리표 목간들이다. 운송하는 물건을 보내는 사람 이름, 받는 사람 이름, 물건과 수량을 적었다. 이를 통하여 청자들이 탐진에서 구워져 개경으로 운반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선박에 실은 청자 꾸러미, 대량 생산된 청자를 쉽게 운반하기 위해 몇십개 단위로 꾸러미를 만들었다. 꾸러미에 물건을 받는 사람 등을 기재한 꼬리표 목간을 달았다.


청자대접, 1208년, 태안 앞바다 출토

강진청자의 바닷길 운송
강진은 부안과 함께 고급 청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한 그릇들의 주요 소비층은 고려의 지배층이었다.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청자와 목간을 통해서도 강진 청자의 바닷길 운송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고려말 문신인 이제현의 '익재난고'에 실린 시를 통해서도 청자 유통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거꾸러진 보리 이삭 그대로 두고, 가지 생긴 삼도 내버려 두었네,
 청자와 백미를 가득 싣고서, 북풍에 오는 배만 기다리고 있구나"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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