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지방호족이었던 태조 왕건이 건국한 불교중심의 사회였지만, 국가를 움직이는 체제는 유학에 근거한 관료 중심의 사회였다. 강감찬, 윤관 등 고려를 대표하는 장군들도 사실은 문신일 정도로 문신 우위의 사회였다. 문신 우위의 사회를 대표하는 유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들 수 있을 것이고, 각 문벌들의 흔적은 족보 등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관료와 문벌
고려시대 관료의 중심은 문신들이었다. 문신들은 정치와 일반행정은 물론이고 전쟁 시의 최고 지휘관도 도맡았다.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강민첨이나, 표청의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윤언이 등은 모두 문신들이었다. 문신으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식은 음서라는 특권적 제도를 통해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문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뒤늦게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과거는 중시되었다. 고려의 관료체제가 성숙되면서 여러 대에 걸쳐 5품 이상의 문신을 배출한 문벌 가문들이 생겨났다. 이들 문벌은 서로 얽히고 설킨 혼인으로 그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였는데, 이자연이 토대를 닦은 경원 이씨가 대표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정부가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삼국사기), 1573년(선조6), 경주부 간행. 고려 정부가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박물관에 전시된 삼국사기는 조선선조때 경주부에서 간행된 책자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에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전체 형식으로 담은 관찬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으로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던 김부식의 주도하에 편찬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기전체:왕들의 전기인 본기와 신하의 전기인 열전을 중심으로 하여, 표(表)와 각 분야의 변천을 기록한 지(志)로 이루어진 역사 서술 체제이다.
* 전시된 '삼국사기'의 내용
- 선덕왕 16년 정월에 비담과 염종 등이 서로 말하기를 왕은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고 하고, 이내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8월에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 지냈다.
"당서唐書에는 정관 21년에 죽었다 하고 통감에는 25년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본사로서 상고해보면 통감이 잘못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 관리들이 사용했던 청자도장과 청동도장
청동도장은 개성에서 출토된 청동제 도장들로 관료층에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손잡이는 사자나 물고기 등의 동물모양을 하고 있다. 도장 면에는 글자 외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가 표현되곤 한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려 관리 강민첨의 초상화(복제품), 보물 588호
고려의 명장 강민첨(963~1921년)의 초상화이다. 강민첨은 현종 10년(1019)에 강감찬과 함께 10만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고려 11대왕 문종은 그의 공을 높이 사 공신각에 그의 형상을 그려 모시게 하였다. 이 초상화는 조선 후기인 정조 12년(1788)에 박춘빈이 원본을 옮겨 그린 것이다. 그 원본이 문종 때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당시의 초상화와 관리 복식의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려 최고 문벌의 기틀을 마련한 이자연의 묘지명 (이자연 묘지명), 1061년(문종15)
고려 11대 왕 문종의 장인이자 순종.선종.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이자연(1003~1061)의 묘지명이다. 이자연은 생시에 세 딸을 문종과 혼인시켰다. 또 손녀 하나는 외손자인 순종의 비가, 손녀 셋은 외손자인 선종의 비가, 증손녀 셋은 예종의 비와 인종 비가 된다. 예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장인 겸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은 그의 손자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최윤의의 묘지명. 고려, 1162년(의종16).고려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세계최초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상정고금예문'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저명한 학자인 최윤의(1102~1162)의 묘지명이다. 최윤의의 해주 최씨 가문은 고조부인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 이래로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여 손꼽히는 문벌이 되었다. 이 묘지명에는 그러한 집안의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최윤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상정고금예문'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출처:중앙박물관>
향리
고려시대 지방사회의 구심점은 향리였다. 그들은 비록 수령 아래에서 행정 말단을 책임진 실무자였지만, 한때 그 지역을 통치하던 호족의 후예답게 상당한 지위를 누리며 중요한 일들을 하였다. 예컨대 향리의 대표격인 수호장은 고을주민들로부터 조세.공물 등을 수취하여 중앙에 바칠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주민들을 이끄는 전투 지휘관이 되었으며, 정월 초하루나 나라의 경조사가 있을 때는 고을을 대표하여 개경의 국왕을 배알하기도 하였다. 또 수호장을 비롯한 향리들은 불탑 조성과 같은 각종 불사를 주도하거나 지역 수호신인 성황신과 산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향리의 자식들 중에는 과거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 바탕에는 지역 사회에서 향리들이 지녔던 사회적.문화적 기반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개경에서 죽은 경주 향리 딸의 묘지명 (호장 기지원 녀 묘지명)
경주 호장(향리의 최고위직) 김지원의 딸의 묘지명이다. 아버지의 이름만 새긴 것은 그녀가 미혼으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향리의 딸이 미혼인 채로 개경에 묻힌 연유는 알 수 없다. 혹 지역 대표로 개경을 오가던 아비를 따라 개경 구경을 왔다가 사망하였으나 경황이 없어 개경에서 장례를 치른 것일 수 있다. 여덟 잎 꽃 모양의 묘지명은 이런 딸에 대한 아비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듯하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향리들이 탑을 세운 과정을 기록한 문서
약목군(지금의 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향리들이 정토사 석탑을 건립한 과정을 기록한 무선이다. 현종 10년(1019)부터 현종 22년(1031)에 걸쳐 오층석탑을 세운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는 1905년 경부선 철도를 건설할 때, 철도에 인접한 절터의 석탑을 해체하던 과정에서 탑속의 놋그릇에 담긴 채로 발견되었다.
"(약목)군사의 호장인 인용교위 이원민과 부호장인 응률, 이성, 품유, 신언, 그리고 호정인 굉운과 부호정인 성헌, 관인 광책 등이 태평 3년(현종14, 1023) 계해년 6월 어느날 (그 탑을) 정도사에 안치하도록 의견을 출납하였으므로.." <출처:중앙박물관>
모범이 되는 향리들의 이야기 (연조귀감), 1890년
조선 정조(1777년) 때 이진흥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뛰어난 향리들의 사적을 집약하고 정리한 3권 2책의 서적이다. 강필효의 서문에는 중앙관리와 달리 향리 가운데 위업을 이룬 이들의 기록이 인멸되는 것을 염려하는 뜻과 향리도 양반과 동일한 신분이라는 것을 재인식시키는 목적이 드러나 있다. 권2와 권3의 관감록은 각각 고려의 향리 44명과 조선의 향리 105명에 관한 열전으로서 성명, 자호, 관력, 일화 등을 출전을 밝혀 수록하고 있다. 현재 펼쳐진 면은 고려시대 향리가 신라말에서 고려 초의 호족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씨 족보에서 말하였다. '신라말에는 여러읍의 토인들이 능이 호령하며 읍을 다스렸는데 고려왕조가 통일한 뒤에 비로소 직호를 내려 그 일을 다스리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를 '호장'이라 칭하였다. 또한 그 자제를 서울에 볼모로 데려오고 관리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성종 때에 이르러 관리에게 읍을 감독하게 하고 호장을 살피게 하고는 끝내 향리로 강등시켰다." <출처:중앙박물관>
'풍風'자 모양의 벼루, 고려, 향리나 그에 준하는 지방 유력계층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벼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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