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는 낙동강 하구 김해평야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옛 금관가야의 도읍지이다. 삼국시대에는 금관소경이 설치되었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대체로 종3품 부사가 수령인 김해도호부가 설치된 지역이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배경과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본향인 까닭에 가야와 관련된 유적들은 많이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 유적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현재 김해는 김해향교와 김해관아 객사 후원, 최근 복원된 김해읍성 북문이 남아 있다.
김해읍성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우리나라 남서해안에 출몰했던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던 읍성 중 하나로, 김해의 지리적 위치가 일본과 가까운 까닭에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던 읍성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16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김해읍성은 둘레 4,418척(약 1.3km)로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성벽 바깥에는 해주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읍성북쪽에는 견고한 산성인 분산성을 두고 있다. 현재 김해읍성은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북문에 해당하는 공진문만이 일부 남아 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김해시 구도심인 동상동에 복원되어 있는 옛 김해읍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공진문. 2008년에 복원된 이 성문은 옹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성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초에 세워졌던 읍성을 조선후기에 중건하면서, 당시의 축성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옹성은 성문 바깥쪽에 반달모양의 장애물 형태의 옹성을 쌓아서,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대체로 조선후기 중국 성곽의 사례를 참조하여 많이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양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 수원화성의 성문 등 조선후기에 쌓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옹성내부로 들어가는 통로
옹성내부의 성벽과 여장.
성문위에 올려 놓은 문루. 조선전기에 쌓는 다른 읍성들의 성문은 개방되어 있는데 비해, 조선후기에 만든 것을 복원해 놓고 있는데, 조총을 방어하기 위해 총구를 설치해 놓는 판문을 달아놓고 있다. 중국이나 수원화성의 것과 비슷하다.
김해읍성 북문은 당시 일반적인 성문의 형태인 아치형 석축인 홍예를 쌓지 않고 성벽위에 문루를 올려놓고 있는 개거식성문 형태를 하고 있다.
성문
김해읍성은 평지에 쌓은 성곽으로 돌을 쌓은 석축성이라고 하는데, 안쪽에는 토축을 쌓고 바깥에 석축을 쌓은 것이 일반적인 형태인데, 현재의 모습으로는 그 형태가 보이지는 않는다.
읍성 안쪽에서 본 김해읍성 공진문
김해읍성 북문, 김해시 동상동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16년(1434)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문종 원년(1451)에는 둘레 4,418척, 높이 13척, 여장 931개소, 적대, 20개소, 옹성을 갖춘 문 4개소, 냇물 한곳, 우물 28곳, 해자는 둘레 4,683척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김해읍지>에 나타난 읍성 4대문의 명칭은 각각 해동문, 해서문, 진남문, 공진문으로서 북문인 공진문은 현종7년(1666)에 부사 이화악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읍성은 일제강점기에 읍성철거정책으로 철거되고 고종 32년(1895) 이후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현재의 김해읍성 북문은 동상동 현 위치에 성벽과 옹성일부가 잔존하던 것을 2006년부터 2년간 전면 발굴을 하여 하부구조 및 축성기법을 조사, 분석하고 <김해부내지도> 등의 고지도류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2008년 3월 복원하였다. <출처:김해시청>
김해읍성 고지도
김해읍성 북쪽에 위치한 김해분산성
'성곽(산성_읍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한산성, 제1암문에서 장경사 신지옹성까지 (0) | 2012.04.20 |
---|---|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입구 제1암문까지 성벽길 (0) | 2012.04.18 |
안성 죽주산성, 서문에서 동문까지 (0) | 2012.03.16 |
안성 죽주산성, 북치성.포루에서 서문까지 (0) | 2012.03.13 |
안성 죽주산성, 동문에서 북치성.포루까지 (0) | 2012.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