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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왕이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래로 백제는 약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존재했었느데, 성왕, 위덕왕, 무왕, 의자왕 재위기간이 대부분으로 그 중 서동요 설화로 잘 알려진 무왕이 재위 기간 40여년으로 가장 길었다고 할 수 있다. 무왕대에는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당나라와 교류하였다. 무왕대에는 신라 공격에 자주 군대를 동원하고 미륵사나 궁궐 남쪽 연못(궁남지)를 파는 토목공사를 많이 일으녀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백제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무왕과 관려된 유적으로는 삼국사기에 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왕흥사가 있는데, 이 사찰은 최근에 출토된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출토된 청동사리함에 이 사찰이 위덕왕대에 577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죽은 그의 아들을 위해 세운 원찰이라고 한다. 무왕과 관련된 유적은 익산에 많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당시 최대규모의 사찰로 3탑, 3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륵사지 서탑에서는 최근 사리기가 발견되어 무왕의 왕후가 백제 귀족가문이었던 사택씨였다는 것이 밝혀져서 서동요 설화에 의문을 갖게 하고 있다.


무왕, 서동의 꿈, 미륵의 통일
무왕은 법왕의 아들로, 600년부터 641년까지 백제를 통치했던 제30대 왕이다. 선화공주를 향한 사랑의 노래, 서동요로 세인들에게 알려졌던 무왕은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찬란한 사리갖춤을 통해 다시금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또한 익산 왕궁리 유적의 오랜 발굴을 통해서 무왕이 건립한 왕궁의 실체가 확인되었다. 사서에 '품모가 영특하고 기상이 호기롭다'고 기록된 무왕은 익산지역에 미륵사와 제석사로 대표되는 장대한 불사를 이루어냈을 뿐만 아니라 40여 년간의 재위 기간동안 끊임없이 신라를 위협했던 왕이기도 했다. <출처:부여박물관>

"용의 아들, 서동", 왕이 되다, <삼국유사>의 무왕이야기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홀로 살던 여인이 용과 관계하여 낳은 인물이 무왕이다. 그는 어릴 때 마를 캐어 팔아서 서동으로 불렸으나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한다. 또한 아름답기로 소문난 신라의 선화공주를 서동요로 꾀어내 결혼하여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출처:부여박물관>

무왕은 왜 서동으로 살았을까?
무왕의 이야기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용은 예로부터 왕의 상징으로 무왕이 '왕의 아들'임을 뜻한다. 무왕의 아버지인 법왕은 위덕왕 재위 시기에는 왕의 조카였다. 담로제에 의해 지방을 통치하던 법왕이 여인을 만나 무왕이 태어나게 되고 이후 왕궁에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빈한한 유년시절을 보내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출처:부여박물관>


삼국사기 권27, 삼국유사 권 2, 영인본, 조선

<삼국유사>의 무왕 이야기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으로, 그 어머니는 서울의 남쪽 연못 가까이에홀로 살다가 연못속의 용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 서동이라고 불리웠던 그는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서동요로 선화공주를 꾀어내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사자사의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부인과 함께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알현하고 왕비의 청원으로 미륵사를 세웠다. <출처:부여박물관>

무왕이전 이야기
위덕왕은 553년 신라가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자 보복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도우러 간 아버지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하자 신라에 대한 백제의 원망은 깊어지게 되었다. 위덕왕은 아버지 성왕의 추복을 위해 사비의 동쪽에 능사를(567년), 서쪽에는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지(577년)에 각각 원찰을 건립하였다. <출처:부여박물관>


왕흥사지출토 사리갖춤(복제품),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 577년경


왕흥사지출토 사리갖춤(복제품),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 577년경. 목탑지  발굴조사 시에 목탑의 심초석 남변 중앙 사리공과 주변에서 출토된 사리기와 공양구이다. 심초석은 크기 100x110x45cm의 장방형으로 기단토 상면에서 약 50cm 하부에 안치되었다. 사리공 위에 연화인동문을 장식한 화강암제 뚜껑이 덮여 있었고 그 안에는 청동사리함이 출토되었다. 사리함 몸체에 음각된 명문을 통해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흥사 낙성(660년 또는 634년)연대보다 빠른 577년에 사찰 또는 찰주가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부여 부소산성 백마강 건너편에 위치한 왕흥사 절터.

부여 왕흥사
왕흥사에 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600년 또는 634년에 낙성되었다고 전한다. 일탑일금당식의 백제 전형적인 가람구조에 목탑지와 동서회랑 부속건물지, 동서석축과 남북석축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시대 목탑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함의 명문을 통해 577년에 봉안 되었음이 밝혀져 기록보다 앞서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다. 왕흥사는 삼국유사에 무왕이 배를 타고 건너가 향을 피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선착장의 발견으로 배에서 내린 왕이 남북으로 길게 만든 어도를 따라 왕흥사 경내로 진입한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왕흥>이 새겨진 기와, 부여 왕흥사지, 고려


꾸미개 편, 부여 왕흥사지, 백제

무왕과 미륵사, 미륵사 서탑 사리기 발견되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을 수리하면서 1층의 심주석 윗면 사리공에서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의 다양한 공양품이 출토되었다. 사리갖춤을 봉안하면서 기원 내용을 적은 금제사리봉영기에는 639년에 무왕의 왕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발원한 것으로 드러나, <삼국유사>를 통해 무왕의 왕비로 알려진 선화공주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왔다. 과연 무왕의 왕후는 사택씨였을까, 신라의 선화공주였을까? <출처:부여박물관>


무왕은 동아시아 최대사원을 왜 익산에 세웠을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알현하고 세운 절이 미륵사이다. 이 설화는 성불한 미륵을 맞이한 전륜성왕 이야기와 유사하다. 풍요롭고 평화로운 통일제국을 다스리는 전륜성왕과 무왕을 동일시한 것이다. 무왕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왜 익산에 세워을까. 무왕의 지지기반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곳에 미륵사를 세움으로써, 주위의 나라들에게 미륵의 통일제국을 꿈꾸는 지배 이념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출처:부여박물관>


벽화, 익산 미륵사지, 통일신라


방울편, 허리띠꾸미개


익산 미륵사 절터.

미륵사지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지 앞에 큰 연못이 있고 경ㄴ에는 세 곳에 탑과 전각, 회랑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는 지금의 미륵사의 동원, 서원, 중원 3원 3탑의 유일무이한 사찰구조와 부합되어 무왕의 미륵사 건립설화를 기록한 <삼국유사>의 내용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가람배치는 중문, 목탑, 금당의 중원과 회랑이 있고 중원 양 옆으로 중문과 금당을 배치한 동.서원으로 구성되었다. 북편으로는 동.서 승방과 강당이, 남쪽에는 거대한 동.서 연못지와 백제시대 수로 및 도로가 확인되었다. <출처:부여박물관>


미륵사지 출투 사리갖춤(복제품), 익산 미륵사지 서탑, 639년경. 백제 무왕과 황후가 온 공력을 다해 봉인했더 사리갖춤이 2009년 1월, 찬란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사리갖춤은 미륵사지 서탑의 1층 심주석 사리공에서 나왔으며 사리호, 금제사리봉영기, 은제관식, 청동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토된 금제사리 봉영기의 기록을 통해 무왕과 왕후(사택씨)가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로 입증되었으나, 서동요 설화에서 무왕의 왕후로 전해지던 선화공주의 존재에 의문을 가져왔다. <출처:부여박물관>


639년에 모셔진 사리봉영기


작은 공양탑편, 고려,


녹유를 입힌 서까래기와


사람얼굴을 그린 연꽃무늬 수막새


<기축>글씨 도장을 찍은 기와, <미륵사>를 새긴 기와, 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