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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에 위치한 봉선사는 500여년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선왕의 위엄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있던 운악사라는 절을 크게 중창하고 봉선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원래 운학사는 고려초인 광종대에 세운 절로 세종대 7개 불교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될 때 혁파되었다가 부근에 세조의 능인 광릉이 조성되면서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게 이 절을 크게 중창하여 원찰로 삼았다. 명종대에는 전국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경기도내 전사찰을 관창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당시 전국 승려들의 교학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과거시험인 승과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서산.사명대사 같은 고승들도 당시 이곳에서 승과에 응시하였다고 한다.

 봉선사를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크게 중장할 당시에는 사찰 가람의 규모는 89칸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찰건물이 훼손되어 여러차례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사찰전체가 불타버려 현재는 오래된 사찰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봉선사는 수원 융건릉의 용주사, 서울 선정릉의 봉은사와 함께 조선시대 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로 현재 사찰 건물들은 대부분 중건된 것이지만 원찰로서의 특징적인 가람배치를 많이 가지고 있다. 봉선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조선초기 범종으로 보물 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대종과 봉선사 괘불이 있다.



봉선사 경내 전경. 봉선사는 주불전이라고 할 수 있는 큰 법당을 중심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어실각이 있었던 지장전과 관음전, 삼성각 등이 뒷편에 배치되어 있고 앞쪽에는 일반사찰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요사채 건물이 있다. 아마도 광릉을 참배하기 위해 국왕을 비롯한 왕실인사들이 방문했을때 그 일행들이 머물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봉선사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주문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는 고승들의 부도들이 모셔져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연잎으로 가득찬 큰 연못이 있다.


연못 옆 작은 수조에 핀 연꽃


봉선사 들어가는 길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광릉의 원찰로 봉선사를 크게 중창할 때 같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사찰 입구에 남아 있다. 이 느티나무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 여러차례의 전란에서도 살아 남았다고 한다.


봉선사는 일반사찰과는 달리 금강문이나 천왕문 등을 출입문으로 사용하지 않고, 조선시대 양반가옥이나 재실처럼 솟을대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대문 양쪽으로는 이 절을 방문한 신도들이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문간채가 준비되어 있다.


양반가옥이나 재실의 문간채와 비슷해 보이는 회랑. 지금은 승려들이나 손님들이 머무는 방으로 쓰이는데, 원래 광릉을 방문했던 왕실인사들을 수행했던 인원들이 묵을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봉선사의 주불인 큰법당. 봉선사 주불전은 정희왕후가 이절을 크게 중창했을때는 서울이북에서 가장 큰 불전이었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하였다고한다. 이때 보통 사용하는 대웅전이라는 이름대신 '큰법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큰법당 오른편에 위치한 지장전.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원래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른 모셨던 어실각으로 봉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때 불타버린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큰법당 왼쪽편에 위치한 관음전. 앞면 5칸으로 지장전과 함께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이또한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린것을 고증을 통해 옛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관음전 뒷편 언덕에 위치한 삼성각. 한국전쟁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일제강점기때 지은 것이라 한다.


지장전 뒷편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


경내 중앙에 세워진 삼층석탑. 오래된 문화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찰입구에 새워진 설법공간인 강당의 성격을 갖는 청풍루. 원래 이곳에 천왕문과 해탈문이 있었다고 한다.


승려들이 수행하는 요사채 공간정 경내 오른편에 위치한 방적당. 원래는 어느 단계의 수행을 끝내고 다음 수행을 준비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오른편 방적당 건물이 승려들이 머무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왼쪽편에 위치한 큰 규모의 요사채 건물인 운하당은 이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머물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광릉을 참배하기 위해 찾은 왕실이나 주요 인사들이 묵었던 공간으로 보인다.


운하당 앞 툇마루. 지금도 이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나 방문객이 툇마루에 앉아서 잠시 쉴 수 있다.


요사채 건물 왼쪽편으로는 판사관무헌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봉선사 주지가 왕실로부터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봉향하는 봉향판사라는 직위를 받았기때문에 판사관무헌이라고 한다. 원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옛부터 이 사찰의 주지가 머무는 공간이다.


운하당 뒷편으로도 여러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사찰을 찾는 신도나 손심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운하당 뒷편에 위치한 장독대


운하당과 문간채 건물 사이의 공간. 사찰을 찾는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새로 지었다는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머물수 있는 공간인 선열당


사찰 입구에 있는 보물 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대종이 걸려 있는 종각


이곳에서 조선 명종대에 승과시험 과거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적은 승과평터 표지석.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실시된 승과에 참여했다고 한다.

봉선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둔이 운악산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운악사는 조선 세종 때 7개의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됨에 따라 혁파되었다가 예종 1년(1469)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 개칭하였다. 봉선사는 명종 6년(1551)에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광무 6년(1902)에는 경기도 내 전 사찰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962년 전국의 사찰 중 제25교구 본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수차례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법당 등 14동 150칸의 사우가 또다시 완전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모두 근대에 건립된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봉선사 대종(보물 397호)이 있으며, 짜임새 있는 구성과 사실적 묘사수법을 보여주는 봉선사괘불이 있다. <출처:남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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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 봉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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