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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박물관 조선실의 제일 마지막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존의 정치.사회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2012년 특별전과 비슷한 형태로 구한말 변혁기에 서양문화와의 접촉과 서양의 영향을 받은 대한제국 시기를 재조명하는 내용으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9세기말 서양열강세력들의 대리전이자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보여준 청.일전쟁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조선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는데,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서양문물의 영향으로 정비된 서구식 교육제도, 의료, 교통, 통신 등의 모습들과 서양인에 비친 조선의 모습들을 말해주는 내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19세기말 급격히 발전하는 서구문화를 따라 잡고자 하는 노력과 변화를 따라 잡지 못하고 일제에 강점당하는 조선사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전시내용으로는 대한제국의 교육에 사용된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교과서를 비롯하여 새롭게 도입된 사진기, 전화기 등 기기들과 선교사들과 함께온 서양 의료진의 유물들, 서양에 비쳐진 조선의 모습 등이 있다.

대한제국과 근대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고종은 광무1년(1897) 10월 환구단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광무3년(1899)에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반포하여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주 선언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었다. 러일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04년 고종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지만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그런 가운데 일본은 점차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함으로써 국권을 침탈하기에 이르렀다. 암울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의 문물은 놀라운 속도로 생활 곳곳에 뿌리를 내렸다. 서구식 교육제도가 도입되고, 독립신문.황성신문 등이 발행되어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고취하였다.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도 이 때 문을 열었다. 특히 전화기.사진기.축음기 등 과학기기와 철도.자동차 등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은 우리의 일상적 삶을 크게 바꿔 놓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척화비, 고종 8년(1871),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안으로 세도 정치의 패배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밖으로 제국주의 열간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하였다. 어린 국왕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후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 척화비는 서울 종로에 세워졌던 것으로 임오군란(1882) 이후 철거되어 묻혔다가 1915년 보신각 이전 시 발굴되었다. "서양 오랑캐들이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우리 자손에게 길리길이 경계하노라." 병인년(고종3, 1866)에 만들고 신이년(고종8, 1871)에 세운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식 교육과 의식의 성장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교육제도가 마련되었다. 1895년 '국가의 부강은 국민의 교육에 있다'는 내용의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되고, 같은 해 학부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소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등 각종 관립학교를 세우고 <국민소학독본>이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정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당시 교과서들은 일본에서 편집한 서양 교과서를 다시 번역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학부 주관 아래 국어독본, 역사, 지리 등 여러 종류의 교과용 도서를 발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 1899년 5월 16일. 1896년 4월 7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최초의 한글 신문이다. 근대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사상, 자주적 근대화를 강조하여 국민 계몽의 역할을 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총4면에 격일간지로 발행되었다가 판형이 두배로 확대되고 일간지로 발행되었다.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창립된 뒤에는 기관지의 역할을 하다가 1899년 12월 4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물리학교과서, 물리학 초보, 안일영 편집, 1909년. 물리학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들을 총8편으로 나누어 한글과 한문을 섞어 설명한 교과서이다. 실험하는 모습이나 물리적 현상들을 간략하게 그림으로 표현하여 이해하기 쉽게 편집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전형식의 국어교과서, 언문, 지석영, 1909년. 사전 형식의 단어집 체제로 된 국어 교과서로 19,000개의 한자어에 독음을 표시하여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였다. 한자의 뜻을 국문으로 풀이하여 국어만 알면 한자의 뜻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한자음의 높고 낮음을 권점으로 표시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중등 산술교과서, 산술신서, 이상설 편집, 1900년. 일본인 편찬의 <근세산술>을 번역하여 편집한 사범학교 및 중학교용 산수 교과서이다. 세로쓰기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계산 과정 등은 가로쓰기를 하였다. 수학에 대한 총론 및 정수.소수.분수 계산법 등을 서술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세계지리교과사, 소학만국지리, 조선학부 편집, 1906년. 세계 지리에 대하여 백과사전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소학교 용으로 국문과 한문을 같이 기술하였고, 대륙별로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총론에서 지리학의 정의, 지구, 대륙, 반도, 산맥, 대양, 육지와 해양의 변화, 세계의 인구, 정부의 체제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 의학의 도입
복격적인 서양 의학의 도입은 의료 선교사 알렌이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의 개설을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탄생하였다. 제중원에는 의학당이 만들어져 근대식 의학교육이 이루어지고, 1894년 병원의 운영권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한편 대한제국은 1899년 무상 의학교육을 내용으로 한 '의학교관제'를 공포하며 점차 근대적 공공의료의 체계를 잡아갔다. <출처:중앙박물관>


알렌이 사용했던 의료기구, 미국 1880년대,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영국인 알레이 사용했던 의료기구이다. 알렌의 후손이 1985년 연세대학교에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증하였다. 알렌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부상당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종에게 근대식 병원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에비슨의 수술사진(등록문화재 448호), 수술장면 유리건판, 1904년,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장면을 찍은 유리건판이다. 에비슨은 1893년 11월부터 제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여, 우리나라에 근대 서양 의학을 보급하는 데 공헌하였다. 박서양은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알렌이 사용했던 안과용 기구(등록문화재 446호, 검안경, 미국 1870년)과 현미경.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한 알렌이 사용하던 검안경이다. 검안경은 눈의 질환을 살펴볼 수 있도록 눈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든 안과용 기구이다. 이 검안경은 1870년대 미국 뉴욕에서 개발되어 상용되던 것을 1980년대 알렌이 국내에 갖고와서 사용하던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해부학 교과서, 에비슨 편집, 1909년, 에비슨이 편집한 해부학 교과서이다. 제중원 의료책임자로 임명된 에비슨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의학교재의 필요성을 느껴서 의학생들과 함께 서양 의학 교과서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대부분의 의학교과서를 번역, 출판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사용 대형 사진기, 프랑스, 1900년

이미지의 포착과 재생, 사진기
사진기는 1839년 프랑스의 다게르와 니에프스가 발명한 다게레오타입의 은판 사진법의 성공 이래 급속도로 발전해 갔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에 사용한 사진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의 사진관에 대한 기록은 1883년 김용원이 촬영국을 연 기록이다. 이외에도 황철, 지운영 등이 사진술을 익혀 사진관을 개설하였다. 특히 김규진은 천연당 사진관을 개업하여 사진의 대중화에 힘썼다. <출처:중앙박물관>


입체사진을 볼수 있는 장치와 입체사진, 1920년대. 입체사진기로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일체감 있게 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를 입체경이라고 한다. 이렇게 입체감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의 좌우 두 눈의 망막에 비치는 영상이 일반적을 대상의 거리에 따라 좌우로 조금씩 밀리기 때문이다. 1850~1920년 사이에 수백만 장의 입체사진이 생산되었고, 다양한 입체 사진기와 입체경이 발매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00~1920년대 사이에 서양인이 찍은 당시 풍경 및 풍속을 담은 입체 사진들이 많이 생산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소리의 이동, 전화기
1876년 벨이 발명한 전화기는 음성을 전기신호로 바꾸어 전달하는 기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82년 유학생 상운이 처음으로 전화기를 중국에서 들여왔고, 1898년 궁내부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 최초로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1902년 3월 한성과 인천 사이에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되고, 6월 한성시내에 교환전화가 개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된 최초의 전화기의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스웨덴 에릭슨사에서 만든 자석식 전화기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석식 전화기는 상대를 호출할 때 자석 발전기를 돌려야 하고 또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통화전류를 공급할 전지를 구비하여야 했다. <출처:중앙박물관>


자석.자동 겸용 전화기, 스웨덴, 1890년대


나팔형 축음기, 소리의 기록과 재생, 영국, 1900년대
원반을 통해 소리를 재생하고 나팔 모양의 혼이 소리를 크게 해주는 축음기이다. 1877년 에디슨이 '틴포일'이라는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축음기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기계안에 사람이 있거나, 귀신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다. 축음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초반에는 유성기 등으로 불리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축음기로 통칭되었다.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기록
19세기 후반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이래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다녀갔고, 그들은 조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들 중에는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부분도 있지만, 조선의 정치.문화.지리.생활풍습.종교 등 서양인의 시각에 비친 조선의 이미지를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에서 발행된 춘향전, 로니, 프랑스, 1892년
고전소설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각색하여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 소설가 로니는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의 도움을 받아 춘향전을 번역하였다. 감미롭게 묘사된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 이야기는 아시아 문학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가지는 이국적인 감성을 자극하였다. 이 책의 삽화에는 춘향과 이도령의 모습이 서양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로니의 번역본은 1999년 프랑스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폴 자클레가 표현한 한국의 이미지, 폴자클레, 프랑스. 아이를 안고 있는 한복 차림의 어머니를 그리 프랑스 태생의 폴 자클레의 작품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아시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새로운 구도와 색채로 다색판화에 담았다. 어머니가 서울에 자주 방문하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담아 한국인을 소재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출처:중앙박물관>


전환기의 조선, 15년각 한국에서의 인연과 생활, 한국과 이웃나라들. 서양인의 눈에 비친 구한말 조선의 모습을 기록한 책자들이다.

전환기의 조선, 제임스 스캔스 개일, 미국, 1909년
캐다나인 제임스 개일이 선교사로 1888년부터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경험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개일은 이 책에서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한글의 우수함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글 성서 번역에도 착수하였고, 직접 한영사전을 편찬하였다. 또한 여성 교육을 실시하여 한국 여성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15년간 한국에서의 인연과 생활, 릴리아스 언드우드, 1904년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조선에서의 체험을 서술한 책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부인인 그녀는 이 책에서 조선의 첫인상부터 직접 목격한 궁중생활과 궁중의 숨은 이야기, 관서.관북지방 여행, 한국 초대 교회의 어려움 등을 기술하였다. 민비의 전용 의사가 되면서 갑신정변과 청일전쟁,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등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이를 기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한국과 이웃 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영국, 1897년
영국인 이사벨라 비쇼이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4차례 방문한 이후 현장 답사와 자료 수집 및 문헌 연구를 통해 조선에서 경험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비숍은 이 책에서 부패한 관료, 가난, 여성의 삶 등에 대한 언급을 통해 당시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한편,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냈다. <출처:중앙박물관>


프랑스 잡지에 실린 고종황제의 모습, 라 비 일러스트레, 프랑스, 1904년. 황제를 상징하는 황룡포를 입은 고종의 모습을 담은 프랑스 대중지 <라 비 일러스트레>의 기사이다. 이 모습은 프랑스인 네사에르가 1903년에 그린 고종의 초상화와 유사하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의 성립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고, 다음 날 '대한'이란 국호를 반포하며 대한제국이 자구 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국의 위상에 맞도록 의례를 재정비하였다. 황제의 인장은 기존의 거북이가 조각된 인장이 아니라 용이 조각된 인장을 사용하였으며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금책을 내렸다. 또 명성왕후를 황후로 추봉하고 미뤄두었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외에도 태조와 고종의 직계 4대조를 황제로 추존하는 등 황실 관련 기념사업을 추진하여 황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고종황제 옥보, 명성황후 옥보,


황태자 택봉 내용을 담은 금책

대한제국의 훈장제도
대한제국의 선포에 이어 여러가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문무관복을 서양식 관복으로 바꾸고, 관복에 다는 훈장 제도는 1900년 '훈장조례;를 반포하면서 시행하였다. 국가의 공훈을 대훈위와, 훈, 공의 세종류로 구분하였다. 훈장은 국기를 상징하는 문양 및 길상 문양으로 도안되었는데 태극장과 팔괘장에는 태극기 문양을 이용하였다. 1888년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정하였다. 태극기는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각종 공식 문서와 우표, 여권, 훈장 등의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훈공 3등 태극중수장, 훈공 5등 태극소수장, 훈공7등 태극소수장, 훈공 3등 팔괘중수장,
 

태극기를 활용한 엽서와 상품카드

서양화법의 수용
서양화법은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조선 후기 회화에 점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회화에도 투시법과 명암법을 중심으로 한 서양의 사실적 회화양식과 대상을 직접 눈앞에 두고 사생하는 기법이 새롭게 도입되었다. 휴버트 보스 같은 서양화가의 내한도 서양화법의 확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화가 안중식과 조석진은 중국에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김규진은 일본에서 사진술을 연마했다. 채용신, 김은호의 초상화에는 서양화와 마찬가지로 빛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나며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산수화 역시 관념 산수 일변도에서 벗어나 실제의 경치를 직접 사생하는 풍조가 확산되며 투시원근법의 활용이 두드러 졌다. <출처:중앙박물관>


구한말 장승업의 제자였던 화가 안중식이 서양화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화법에 충실했던 작품이다.

백악춘효, 안중식, 1915년, 복제품
여름날의 백악산과 경복궁의 풍경을 그린 안충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안충식은 장승업으로부터 전통화법을 계승했지만 1881년에 중국에 가서 서양화법의 기초를 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대체로 전통화법에 충실한 작품을 제작했지만 실경사수도 여러 점 남겼다. '백악춘효'에서 미절준법으로 그린 백악산은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미적으로 입체감을 나타내려 한 점에서 전통의 현대적 계승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백악춘효(가을본)
가을날의 백악산과 경복궁의 풍경을 그린 안중식의 작품이다. 안중식의 같은 제목의 여름 그림 외에 '을묘추일'이라고 쓴 가을 배경의 또 다른 그림이다. 두 작품은 매우 비슷하게 그려졌지만 여름본이 전체적으로 선명한 느낌을 주면서 백악산을 화폭 가운데에 두고 좌우대칭으ㅐ 해태를 그리고 있는 반면, 가을본은 백악산이 화면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해태도 하나만을 묘사하고 있다. 1915년에 그려진 두 점의 그림이 봄이 아니라 여름과 가을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림의 제목을 봄날을 맞이하는 백악산의 새벽이란 뜻의 '백악춘효'라 했던 이유는 일제강점이 곧 끝나고 봄날의 샌새벽이 오리라는 작가의 시대적 염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숲과 골짜기, 이용우, 1935년. 깊은 골짜기에 유유히 날고 있는 기러기와 인물을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필치로 그린 이용우의 작품이다. 듬성듬성한 숲과 골짜기에 색을 부옇게 하여 마치 공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몰골법 위주로 모호하고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새벽 또는 황혼 무렵의 관, 비온 후 안개에 싸인 산의 정취를 표현할 때 효과적인 몽롱체화법은 1920년대에 이상범, 노수현, 김은호, 최우석, 김정원 등 근대 화가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공간과 빛을 강조하는 서양화 기법을 응용한 이것은 일본의 명치시대에 새로운 혁신을 부르짖은 화가들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대한제국의 기념장, 대한제국기에는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기념장이 총5회에 걸쳐 발행되었다. 1901년 고종황제 성수 50주년을 맞아 관계자들에게 수여한 것을 시작으로 1902년 고종황제 망육순과 등극 4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장이 발행되고, 1907년에는 황태자의 가례 기념장과 순종황제 즉위 기념장이 발행되었다. 그 후 1909년 순종황제의 민정시찰을 기념하기 위한 남서 지역 순행 기념장 등이 발행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딱지본 소설, 1908~1926년. 딱지본이란 책의 표지가 아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시장터의 국수 가격인 육전 정도로 한권을 살 수 있었기때무에 '육전소설'이라고도 한다. 1908년경부터 나오기 시작한 딱지본 소설은 1920~3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딱지본 소설은 파격적인 색상과 민화형식과 서양화 기법을 사용한 일러스트가 결합되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청전>,<춘향전> 같은 고전 소설도 있었지만, 서양세계에 대한 호기심, 자유연애 등 변화하는 도덕관념을 담거나 과학소설, 탐정소설 등 새로운 소재를 다룬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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