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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28세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초계문신으로 발탁되고, 수원화성 축조에 서양식 축성법인 거중기를 제안하는 등 관료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다산의 관료로서의 업적도 매우 뛰어났지만, 그는 정조 사후에 집권세력의 공격을 받아 전남 강진에서 18여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를 대표하는 많은 저술을 남기고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보낸 강진은 그의 외가인 윤선도와 윤두서 일가가 터를 잡고 있는 지역으로 외가 친척의 도움을 받으며 다산초당에서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강진에서 대표적인 저술인 형사사건 처리 지침서라 할 수 있는 <흠흠신서>, 양전제도를 개혁을 비롯하여 지방관 역할에 대해 저술한 <목민심서>, 중앙 행정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경세유표>를 저술하였다. 또한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근처에 있는 백련사를 중심으로 초의선사를 비롯한 많은 승려들과도 교류하였고, 지역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정약용의 저술은 당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구한말 서양문물의 도입과 함께 시대의 변화에 대응한 학문적인 측면에서 재조명되어 고종대부터 그의 저서는 고종을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졌으며 20세기 초 애국계몽운동과정에서 그의 저술이 많이 소개되었고, 오늘날까지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많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유배지 강진의 생활: 다산초당, 그리고 형 정약전과의 교류
강진으로 유배 온 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던 정약용은 47세 되던 순조 8년(1808) 다산(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외가 친척의 산정에 정착하였다. 10년을 머문 이곳을 다산초당이라 한다. 이처럼 정약용은 유배 생활을 하면서 외가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약용은 어릴 때부터 둘째 형 정약전을 무척 따랐고, 평생 자신을 알아주는 벗이라 여겼다. 그는 자신처럼 천주교에 연루되어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학문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였다. 순조 16년(1816) 정약전이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친형이자 자신을 알아주던 유일한 벗을 잃은 괴로움으로 통곡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전남 강진만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다산초당. 다산은 이곳에서 10여년을 머무르면서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정약용의 조증조부 윤두서가 그린 우리나라 지도, 보물 481-3호, 동국여지도, 윤두서, 숙종36년(1710). 숙종 36년(1710) 공재 윤두서(1688~1715)가 그린 조선 전도이다. 윤두서는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기도 하다. 강줄기와 산맥의 표시를 대부분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주변 도서를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외증조부 윤두서의 지도에 대한 정약용의 평
이 조선지도 한 폭은 나의 외조 윤공재의 작품이다. 정씨본에 의하면 압록강이 서남쪽으로 의주까지 이르는데, 의주를 백두산과 비교해 볼 때, 백두산이 북으로 더 나간 것의 거의 3~4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지금 이 본은 압록강이 서쪽으로 흐르면서 약간 남으로 나왔기 때문에 백두산과 의주가 남북으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으니, 이것이 정씨본보다 못한 점이다. 그러나 삼남(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도서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그려 넣어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씨본에는 모두 이를 생략하였으니, 이것은 정씨본의 하자이다. 또 정씨본은 모든 산에 대해 뾰족뽀족한 산봉우리의 높고 낮은 형태로 그리는 데, 모두 지면에 따라 산봉우리가 위로 향하게 하였다. 그래서 산의 향배가 분명하지 않고 그 맥락도 산만하여 끊겼다 이어졌다 하였다. 그러나 이 본은 산맥에 있어서 꼬불꼬불한 모먕만 만들었고, 명산에 대해서는 푸른 빛을 약간 더 진하게 칠했을 뿐, 모든 봉우리의 높낮음이 없어, 마치 공중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은 화법에 있어서 매우 타당한 것이다. 공재의 그림 솜씨가 세상에 뛰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묘법을 터득한 점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형 정약전을 걱정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 정약용 간찰, 순조 11년(1811). 흑산도에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을 걱정하며,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형을 잘 보살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현산어보>의 저자로 유명한 정약전은 순조1년(1810)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약용이 지은 주역 해설서, 주역사전, 정약용, 19세기 중엽. 순조8년(1808) 정약용이 주역을 주희의 <주역본의>에 근거하여 풀이한 책이다. 정약용은 공자 이후의 유학이 진한시대로 접어들면서 변질된 요소가 많다고 여겨 진나라 이전에 행해졌던 수기치인의 학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입장에서 유교 경전을 고증하고 합리적으로 해석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유배지 강진의 생활: 제자 교육과 자녀 사랑
정약용은 유배 생활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 자주 절을 찾았고, 그곳의 학승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아암 혜장과 초의 의순이 대표적인데, 특히 초의 의순은 정약용의 지도를 받으며 유교 경전을 열심히 익혔다. 정약용은 향리나 양반의 자제들을 기르치는 데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제자들은 경학, 경세학, 농학, 인문지리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순조 6년(1806) 혼인 30주년을 맞아 정약용은 부인 홍씨로부터 빛바랜 붉은 치마를 받았다. 그는 그 옷감에다 교훈과 사랑을 담은 글과 그림을 넣어 몇 년 후 자식들에게 전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유배 시절 정약용의 일상이 담긴 편지, 정약용 간찰, 순조 17년(1817), 순조 17년(1817) 정약용이 강진 백운동에 사는 이덕휘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덕휘는 정약용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시헌의 아버지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 다산초당도, 순조 12년(1802), 복제품. 유배 시절에 정약용과 활발하게 교류했던 초의선사가 1812년 다산초당을 방문하고 그린 그림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을 직접 설계했을 정도로 이곳에 애정이 깊었다. 그림 왼쪽 초가가 초당, 오른쪽이 다산이 수천권의 책을 쌓아 놓고 집필에 몰두한 동암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다산초당의 네 가지 경지를 읊어 쓴 시, 보물 1683호


정약용 초상화, 전 초의 의순, 19세기 말, 초의 의순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정약용의 초상화이다.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달리 불교적인 색채가 강해 보인다. <출ㅊ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제자 황상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 순조 2년(1802)~ 헌종 2년(1836). 정약용의 애제자 황상이 스승 정약용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첩이다. 이 서첩을 통해 정약용이 유배 초기에 어떻게 살았고 제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쳤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형 정약전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어, 형제간의 학문적 교류도 살필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은봉 선사에게 보낸 편지, 정약용이 은봉 선사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를 통해 정약용이 유배 기간 중에 승려들과 깊은 교분을 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그린 매화 그림, 매조도, 순조 13년(1813). 정약용이 달을 위해 그린 것으로 매화가지에 멧새 두 마리가 앉은 그림이다. 혼인 30주년 기념으로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에다 그린 것으로 정약용이 쓴 시도 보인다. <출처: 중앙박물관>

고향 마재로 돌아와서
순조 18년(1818) 57세로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온 정약용은 재판 지침서인 <흠흠신서.를 지었다. 이로써 <경세유표>, <목민심서>와 함께 이른바 1표 2서가 완성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유배 시절부터의 유교경전 연구와 저술을 마무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작, 김매순, 홍석주 등의 학자와 당파를 떠난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 만년에 그는 훗날 자신의 저술이 충분히 평가되기를 기대하며, 한강에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거나,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며 산천을 즐기는 등 편안한 노년을 보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아들 정햑연을 비롯한 제자들은 서로 지속적으로 교유하면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려 노력하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부인 홍씨의 죽음을 알리는 글, 부인 홍씨 부고장, 정약용, 헌종 4년(1838). 정약용의 부인 풍산 홍씨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장이다. 정약용은 부인 홍씨와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홍씨는 정약용이 죽 2년 뒤인 헌종 4년(1838)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의 시를 써 넣은 산수 그림, 작자미상. 미법으로 그린 산수도에 정약용이 시를 쓴 것이다. 구름 자욱한 원산을 배경으로 선경의 언덕 위에는 정자가 배치되어 있고, 강에 떠 있는 배에는 낚시하는 인물을 묘사한 남종문인화이다. 화면을 가르는 상하2단 구도에 미법준으로 그린 산과 토피가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매씨상서>가 위작임을 주장한 책, 매씨상서평, 19세기 중엽. 순조 34년(1834) 고문상서라고 칭하는 <매씨상서>의 진위를 고증하여 위작임을 주장한 정약용의 저서이다. 이 책에는 정약용의 외손 윤정기가 글을 읽고 보충한 흔적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과 학문으로 교류한 김매순의 문집, 대산집, 김매순, 19세기말. 조선후기 문신 김매순(1776~1840)의 문집이다. 김매순은 성리학에 정통하고, 문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이 책에는 김매순이 정약용과 <매씨상서평>을 두고 학문적 교류를 한 글이 남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정약용이 시를 써 넣은 물고기 그림, 어도, 작자미상,


노년에 강진의 제자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정약용의 편지, 정약용 간찰, 헌종1년(1835). 정약용 노년의 강진 제자들과의 관계를 볼 수 있는 편지글이다.제자들과의 모임인 다산계가 무너져 제자들과도 소원해지는 등 쓸쓸한 노년이 보이기도 한다. <출처: 중앙박물관>


죽기 직전의 삶과 생각을 보여주는 정약용의 편지, 헌종 2년(1836). 정약용은 결혼한 지 60년 되는 회혼일에 세상을 떠나는데, 이 편지는 회혼일을 단지 며칠 앞두고 쓴 것이어서 정약용의 죽기 직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시가 있는 그림


목민심서가 널리 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약용의 편지, 정약용 간찰, 19세기. <목민심서>가 세상 다람들에게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을 우려하는 편지글이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불려난 뒤에도 조심스럽게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새로 수령이 된 사람에게 주는 훈계를 담은 편지, 정약용간찰, 순조 33년(1833). 정약용이 새로 임명된 현감에게 목민관으로서 시행해야 할 규범을 적어 준 편지글이다. 여섯가지 노목의 당부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이 호의선사에게 보낸 편지, 정약용 간찰, 순조 34년(1834). 정약용이 평소 아끼던 호의 선사에게 보낸 편지로, 호의 선사는 속성이 정씨이다. 승려 초의.철선과도 교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 사후 재평가
고종 13년(1876)의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변화된 시대를 위한 논리가 절실해졌다. 이에 정약용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고, 고종은 정약용의 저술을 전부 필사하게 하여 이를 읽었다고 한다. 20세기 초의 애국계몽운동과정에서, 장지연은 <목민심서>를 비롯한 정약용 저작들의 간행을 주도하였고, 신문과 학교교과서에도 정약용이 크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정약용 타계 100주년을 기념해서는 활자본 <여유당전서> 76권이 간행되고 강연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후 그의 사상과 학문이 지진 가치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지속적으로 높이 평가되었고, 오늘날까지 많은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의 저술에 대한 신문 논설, 황성신문, 1903년. 광무2년(1898) 9월 5일에 창간되어 국한문으로 발간된 일간 신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을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로 유명하다. 장지연은 이 신문의 논설을 통해 정약용의 저술을 소개하였다. 1903년 4월 14일자 논설에는 <아방강역고>에 대한 내용을 싣고 있으며 이후 광고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 책을 알렸다. <출처:중앙박물관>


근대 초등학교 교과서, 유년필독석의, 현채, 1907년. 대한제국 시기 초등학교 교과서인 <유년필독>의 교사용 교재이다. 애국심과 자주.자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민족주의 교육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 책에 정약용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에 대한 글이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


정약용의 학문적 업적을 다룬 신문기사, 동아일보. 1934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 신문이다. 정약용 사후 100년을 기념하여 이 산문에서 정약용에 관한 글을 다수 게재하엿다. 여유당전서의 발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청련보의 글과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최덕한의 글이 특히 주목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신조선사에서 만든 정약용의 전집, 여유당전사, 1936년.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정약용의 전집이다. 1934~38년에 신조선사에서 정약용의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안재홍이 교열에 참여해 활자본 154권 76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후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정약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출처: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