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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중흥기라고 할 수 있는 정조대에 활약한 실학자이자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벼슬길에 오르기전에는 서울에서 이가화, 이승훈 등과 교류하면서 실학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성균관 유생이었던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다. 28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었다. 관리로서 여러지역에 고을 수령으로서 업적을 쌓았으며, 거중기를 이용한 서양식 축성법을 이용하여 수원화성 축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제안한 서양식 축성법은 <수원화성의궤>에 도면으로 자세히 남아 있다. 정조 사후에는 천추교와 연루되는 등 집권세력의 공격을 받아 외가가 있던 전남 강진에서 18여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기간 동안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저술인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중앙박물관에서는 그의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을 돌아볼 수 있는 특별전 <다산 정약용 -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보듬다>를 개최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하여, 정조가 하사한 은상감 척, 그가 저술한 서양식 축성법을 반영한 <화성성역의궤> 등과 그가 강진유배 시절 교류했던 많은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석학이 살아왔던 길을 일관성 있게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전시회라 할 수 있다.

전시를 열며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타고난 학문적 자질로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젊은 관료 정약용은 정조가 죽은 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먼 남쪽 지방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무려 18년에 걸친 유배 기간 동안, 정약용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술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유교 경전에 대한 깊은 연구와 함께, 이를 바탕으로 제도 개혁과 민생개선의 방향을 제시하는 방대한 규모의 저술에 전념하였습니다. 올해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를 기념하는 테마전 '다산 정약용 -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보듬다'를 마련하였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전시가 나라와 민초들을 사랑했던 대학자 정약용의 치열한 삶과 학문, 그리고 그가 몸담았던 조선사회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더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대표적인 다산 유적지인 남양주 조안면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이 만년에 살았던 저택인 여유당.

고향, 그리고 한양의 새로운 공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영조 38년(1762)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현리에서 관리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곱살에 시를 지어 아버지를 놀라게 하고, 열살 때에 개인 문집을 만드는 등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다. 15세 되던 영조 52년(1776)에 한양의 풍산 홍씨와 혼인하며 한양에 살게 된 정약용은, 자형인 이승훈,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 등과 가까이 지냈다. 또 이승훈의 외삼촌으로 학문적 명성이 높던 이가환도 만났다. 이들은 성호 이익(1681~1763)의 학문을 계승하는 사람들이어서, 정약용도 이익의 저술을 읽으며 서학을 비롯한 새로운 학문 세계를 접하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노닐던 한강 주변의 명승지, 한임강영승도권, 정수영, 조선 정조 20년(1995)경. 조선후기 지리학자 정상기의 증손자인 정수영(1743~1831)이 한강과 임진강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이다. 한강변은 광주를 출발하여 여주와 원주 하류까지 14곳의 명성을 담았다. 정약용은 한강을 오르내리면서 사람들과 교유하고 견문을 넓혔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 마테오리치, 19세기말, 선조 28년(1595) 마테오리치(1552~1610)가 한문으로 쓴 서학서로, 책 제목은 '천주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책이 출간되자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론이 일어났다. 이후 한국.일본에도 전해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안정복이 줄여 엮은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유선, 안정복 엮음, 19세기 중엽. 안정복(1712~1791)이 스승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분야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선정하여 간명하게 정리한 것이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 7대조 정호선의 시를 새긴 판, 정호선시판, 정조4년(1780). 정약용의 7대조 정호선(1571~1633)이 쓴 시가 적힌 시판이다. 19세의 정약용이 아버지 정재원과 함께 경상북도 예천의 선몽대를 방문했을 떄, 선몽대의 주인이 지은 칠언절구 2수를 보여주자 정재원이 아들에게 이 시를 판에 새기도록 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은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학문을 익히고 견문을 넓혔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종이 지은 천주교 교리서, 주교교지, 정약종, 1897년. 정약종(1760~1801)이 지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이다. 각 조항들을 문답식으로 구성하고 한글로 씀으로써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천주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저자 정약종은 정약용의 형으로 순조 1년(180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순교하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성군을 만나: 정조와 정약용
정약용은 23세의 성균관 유생이던 정조8년(1784), <중용>에 관한 정조의 질문에 잘 답변하여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한 정조 13년(1789), 그는 28세의 나이로 규장각 초계문신에 뽑혔다.(초계문신이란, 자질이 우수한 젋은 관료들을 규장각에 소속시키고 학문을 깊이 연마하도록 정조가 특별히 마련한 제도이다.) 정약용은 화성축성을 위한 설계를 하고, 거중기를 고안하여 공사의 효율을 높이는 등 정조의 신임을 받으며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한때 천주교를 믿은 일과 형 정약종 등 가족과 친인철의 천주교 신봉으로 인해 반대파의 공격을 많이 받았고, 결국 정조가 죽은 이듬해(1801)에 강진에 유배되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조대에 만들어진 왕실 도서관의 그림, 규장각도, 김홍도, 1776년. 정조가 영조의 글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는 뛰어난 젊은 관료들을 '초계문신'으로 선발하여 이곳에서 연구에 전념케 함으로써 규장각을 중추적인 학술기관으로 성장시켰다. 초계문신들은 이후 조선 정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수원 화성의 건축 보고서, 화성성역의궤, 1801년. 정조 18년(1794) 1월부터 정조 20년(1796) 8월까지 진행된 화성 성곽 축조 공사의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의궤이다. 중국의 축성제도를 도입한 점, 축성법을 자세하게 기록한 점, 축성에 사용한 각종 기계의 도설을 수록한 점 등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쓴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 정약용, 20세기초. 정조 22년(1798) 정약용이 마진(홍역)의 치료법을 쓴 의학서이다.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마진을 중심으로 그 증세를 관찰하고 치료법을 기술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마진학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조 임금이 하사한 자, 철제은상감척, 정조20년(1796). 정조 20년(1796) 2월 초하루 중화절에 정조가 공경대부와 측근 신하들에게 내려준 자이다. 이 자에는 정조가 직접 지은 시가 은으로 입사되어 있다. 정약용은 금정 찰방으로 재직하면서 정조로부터 이 자를 받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정조가 얼마나 정약용을 신임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살아남아 세운 뜻, 학문의 길
정조의 사망을 계기로 정조의 측근들은 반대파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가환, 이승훈, 숸철신, 정약종은 고문으로 죽거나 처형되고, 정약용은 강진,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6경 4서에 관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또 이를 바탕으로 순조 17년(1817)에는 제도 전반의 개혁 원리를 밝힌 <경세유표>를 쓰기 시작하고, 이듬해엔 수령과 향리의 부패를 비판하고 지방행정의 지침을 제시한 <목민심서>를 지었다. 유배 중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정약용은, 유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국가제도의 개혁과 민생 개선을 위한 방대한 저작을 남긴 것이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세상을 바루려는 뜻, 1표2서
정약용은 세상 이치란 고금이 같으므로 옛 성인의 제도를 참작하여 시대 상황에 맞게 변통한다면 그 시대에 필요한 개혁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6경 4서에 관한 연구는 경전을 통해 옛 성인의 제도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고, 1표 2서로 이루어진 경세학 연구는 경전 연구를 바탕으로 이를 시대적 상황에 맞게 변통한 것이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지은 형사사건 처리 지침서, 흠흠신서 19세기 중엽. 순조 19년(1819)에 처음 완성되어 순조 22년(1822)에 간행된 형사 사건 처리 요람이다.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부사와 형조 참의를 지내면서 여러 건의 형사 사건을 직접 다스렸으며 이때 쌓은 실무적 지식과 국내외의 이론을 종합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관리들의 청렴을 강조한 글, 목민심서, 19세기 중엽. 정약용은 수령이 행정을 구체적으로 잘 몰라서 생길 수 있는 구조적인 부패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수령에 임명된 사람이 임지로 갈 때부터 해임되어 돌아올 때까지으 처신과 구체적인 행정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또한 수령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면서 청렴을 강조하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양전제도 개혁을 주장한 글, 목민심서, 정약용, 19세기말 이후. 정약용은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의 경우, 향리들의 협잡이 많아 수령의 현명한 처리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수령이 양전과정을 정확하게 알아서 향리들의 농간에 속지 않고 백성에게 해가 없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호적제도 개혁을 주장한 글, 목민심서, 정약용, 19세기 말. 정약용은 백성의 생활안정을 위해 호적제도의 정비를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수령이 정확한 가좌표를 만들어 향리들의 농간을 막고 백성의 국역부담을 고르게 하는 방법을 서술하였다. 그의 개혁론은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여 구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경세가들의 개혁론과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중앙 행정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글, 경세유표, 정약용, 19세기 중엽. 정약용은 6조의 소속 관서를 각 20개로 정비하고 인사 고과를 엄격히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던 호제에서 교육기능을 겸임하도록 한 것은 경제 문제 해결이 백성들의 교육과 연결되어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여전제를 주장한 글, 여유당집, 정약용, 19세기 중엽. 정약용이 여 단위로 공동으로 소유하고 생산하는 여전제를 주장한 글이다. 그는 이 제도를 통해 당시의 민생 문제와 국방 문제를 결합하려고 하였다. 공동 소유, 공동 생산을 강조하는 점에서 원시 사회주의 사상으로 평가되는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정전제를 주장한 글, 경세유표, 정약용, 19세기 중엽. 정약용은 원래 여전제를 주장하였다가 유배기를 거치면서 정전제를 주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전국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하여 재분배하거나 모든 토지를 구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관에서 먼저 기준이 되는 정전을 마련하여 1/9만을 세금으로 받도록 하고 점차 전국으로 확대해 나가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중앙박물관 특별전>


정약용이 지방행정 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글, 경세유표, 정약용, 19세기 중엽. 정약용은 지방행정의 효율화를 이루기 위해 기존의 군현제도를 개혁하여 12개의 성으로 개편하고 크고 작은 군현을 비슷한 규모의 군현으로 재편할 것을 주장하였다. 1896년 지방제도 개혁 당시 13부제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에 정약용의 주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앙박물관 특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