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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세기초까지 절정을 이루었던 고려의 청자 제작기술을 13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그 경제적 기반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도자기의 모양은 단순해지면서, 두께는 두꺼워졌고, 아름다운 비색 청자 유약은 녹갈색이나 황갈색을 띠게 되었고 화려한 상감무늬는 점차 단순해졌다. 특히 몽고와의 전쟁이 끝난후 일본과의 해상무역이 쇠퇴하고,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가에 있었던 전남 강진이나 전북 부안의 도자기 생산가마들이 폐쇄되고 장인들은 내륙으로 피난하면서 도자기의 생산지가 전국으로 확산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고려말기의 도자기 수준은 전성기에 비해서 퇴보하게 되었고, 이런 도자기의 품질을 관리하기 위해서 도자기의 한쪽 부분에 글자를 상감으로 새겨 넣게 되었다. 도자기에 새겨진 글자로는 궁궐 관청을 의미하는 <보원고>, <양온>, <사온서> 등을 비롯하여 제작년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사>, <임신>, <계유> 등이 적혀 있다.

변화와 쇠퇴
1270년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1274년 중국 원나라 공주가 당시 고려태자와 결혼하면서부터 이른바 '원간섭기'로 접어들었다. 당시 국내 상황은 권문세족의 부정부패로 인해 국가 재정은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또 강진과 부안 등 서남 해안가에 위치한 주요 가마들이 14세기 후반 이후 왜구의 출몰에 큰 타격을 입으면서 많은 장인이 내륙으로 피난하여 고려청자의 제작 여건은 매우 악화되었다. 이 시기 그릇의 한 부분에 글자를 상감으로 새겨 넣은 예들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간지가 있는 경우고 또 다른 하나는 사용처가 명시된 것이다. 고려 후기 청자에 간지를 새기게 된 목적은 하락한 도자기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 그리고 공물품이었던 청자가 중간 관리층에 의해 수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모란무늬 항아리, 고려 13세기


<기사>가 새겨진 물가풍경무늬 대접, 고려 14세기, 충남 보령시 대천읍 해저


<기사>가 새겨진 꽃무늬 대접(고려 14세기), <기사>가 새겨진 구름 학무늬 대접(고려 14세기, 충남 보려시 주보면 앞바다)


<경오>가 새겨진 물가풍경무늬 대접(고려 14세기), <계유>가 새겨진 물가풍경무늬 대접(고려 14세기)


<기사>가 새겨진 연꽃넝쿨무늬 대접, 고려 14세기, 충남 보령시 대천읍 앞바다


<임신>이 새겨진 물가풍경무늬 대접, 고려 14세기


<계유>가 새겨진 구름 학무늬 대접(고려 14세기), <정릉>이 새겨진 연꽃넝쿨무늬 대접(고려 14세기)


<보원고>, <양온>, <을유사온서>가 새겨진 도자기. 보원고, 양온 사온서는 고려시대 궁궐 물품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관청에 납품하는 도자기의 품질을 관리하기 위해서 해당 관청의 이름을 도자기에 새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에 비해서 그 제작기술이 많이 떨어진 청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원고>가 새겨진 연꽃 버드나무무늬 매병, 고려 14세기, 보원고는 궁중의 귀중품을 보관하던 관청이다. 1369년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의례를 행하면서 설치하였다. 공민왕 사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국가 왕실과 관련된 행사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양온>이 새겨진 연꽃 버드나무무늬 편평, 고려 14세기, '양온서'는 고려시대 왕실의 술과 감주를 담당했던 관청이름이다. 14세기 중앙 관청용 청자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전 시기에 비해 문양과 기형, 유색 등에서 청자 품질이 매우 안 좋은 상황을 볼 수 있다. <을유사온서>가 새겨진 버드나무무늬 매병, 고려 14세기, 충선왕 복위년(1308)에 이루어진 개편에서 '양온서'가 '사온서'로 변경된 후 여러 번 반복을 거듭하다가 공민왕 21년(1372)에 사온서로 확정되었다. 전성기 청자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 14세기 청자의 품질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