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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때 전진에서 승려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하면서 부터이고, 백제는 고구려와 별개로 4세기에 동진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 신라는 삼국 중 늦은 시기인 5세기 눌지왕때 고구려에 의해서 전파되었다. 신라는 토착신앙이 강해서 실제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6세기 법흥왕때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신라가 국가적으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부터 경북지역에서는 불교가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경주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사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 비해 불교가 먼저 전파된 경북지역에는 이른시기부터 불상을 만드는 조상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영주, 봉화, 안동, 군위 등 여러지역에서 삼국시대 금동불과 마애석불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우리나라 성리학들 도입한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로 알려져 있지만 신라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7세기에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불상들이 여러점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신라가 불교가 받아들였던 초기부터 사찰또는 불교관련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구박물관에서는 3점의 국보급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데, 구미 선산읍 봉한동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 1점과, 금동관음보살입상 2점이다. 이 불상들은 통일신라 전성기때 만들어진 불상들로 그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며 매우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대구.경북의 불교문화
신라의 불교수용, 신라에서는 법흥왕 14년(520)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경북 북부지역을 통해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사람은 고구려 승려 묵호자로 눌지왕대에 일천군(현재의 구미시) 모례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불교조각, 물교문화의 수입 창구이자 신라불교의 보급 통로인 경북 북부지역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성행하였다. 영주, 봉화, 안동, 군위, 구미 등의 여러 지역에 삼국시대 금동불과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의 마애불과 석불이 남아 있다. 이는 경북지역에서 이른 시기부터 활발한 조상활동이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공예, 대구.경북 지방 불교문화의 특징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 속에서 발견된 갖가지 사리갖춤으로 대표되는 불교공예품을 통해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칠고 송림사 오층전탑과 김천 갈항사터 삼층석탑,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등에서 발견된 사리함과 녹색유리로 만든 사리용기, 그리고 사리와 함께 봉안된 각종 공양품들은 당시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문화의 보고 팔공산, 대구.경북 지방에는 갖가지 불교문화재가 소장된 명찰이 많은 바, 특히 팔공산은 경주의 남산에 비견되는 불교문화의 보고이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 고찰인 동화사는 고려시대에 정해결사 운동을 전개한 보조국사 지눌이 머물렀고, 임진왜란 때 유정이 승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불상.불화.석조불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불교문화재를 간직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영천의 은혜사는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과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이밖에도 초조대장경 경판을 판각하였던 부인사와 조선 영조의 어의가 나온 파계사 등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곳곳에 분포해 있다. <출처:대구박물관>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 국보 182호
1976년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봉한 2동 뒷산에서 공사를 하던 중 금동관음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 184호)와 함께 출토되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발견되기 70여 년전에 어느 농부에 의하여 부근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가, 몇년 뒤 현재의 장소에 다시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왼손과 왼발 일부가 없어지고, 얼굴과 가슴에 약간의 녹이 있으나 도금 상태는 좋은 편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양감 있는 얼굴은 원만하며, 예리한 선으로 눈·코·입을 표현하였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몸에 달라 붙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옷자락은 배부분에서 평행한 U자형의 주름을 이루고, 다리 부분에서 좌우로 갈라져 대칭을 이루면서 발목까지 드리워졌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여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이 부드럽고 단순하며, 옷주름이 정리되어서 단정한 인상을 주고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생동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소 경직된 자세와 고졸한 미소가 남아 있는 얼굴, 우전왕식의 착의 법, 뒷면에 작은 틀잡이 구멍이 있는 중공식 주조법 등에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부처, 국보 182호, 경북 구미 봉한동, 통일신라 8세기


국보 182호로 지정된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이 불상은 1976년 경북 선산읍 봉한동에서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였으며, 그 위에 상투모양의 머리를 올려놓고 있다. 양감 있는 얼굴에 예리한 선으로 눈.코.입을 표현하였다.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이 부드럽고 단순하면서도 단정한 인상을 주고 있다. 7세기 후반 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국보 183호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에서 공사를 하던 중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4호)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상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자연스럽고 유연한 자세로 서 있다. 머리에는 꽃장식의 관(冠)을 썼는데, 관의 정면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눈·코·입의 표현이 분명한 얼굴은 둥근 편으로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신체는 비교적 날씬한 편으로 균형이 잘 맞으며, 옷은 몸에 얇게 밀착되어 있다. 옷자락은 오른팔에 한 번 걸쳐 무릎 앞에서 둥글게 드리워지고, 다시 왼팔 위로 걸쳐 그 끝이 대좌 위로 내려뜨려졌다.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으며, 어깨에서 시작한 구슬 장식은 길게 늘어져 X자를 그렸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과 X자형의 구슬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 봉오리를 가볍게 들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서 물건을 잡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물건은 없어진 상태이다. 대좌는 7각형이며, 아래로 향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현재 꽃장식 관의 왼쪽 윗부분과 양 손 아래로 내려뜨린 옷자락 및 왼손 손가락 일부가 파손된 상태이며, 광배(光背) 또한 없어졌다. 얼굴과 오른손에 녹이 슬어있으나 도금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전체적인 균형과 조각수법이 뛰어난 이 보살상은 삼국시대 후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며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문화재청>


관음보살, 국보 183호, 경북 구미 봉한동, 신라 7세기


금동불입상(국보182호)와 함께 출토된 2점의 금동보살입상 중 하나이다. 보살상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대좌 위에 무릅을 약간 구부린 채 서 있는 자세이다. 신체는 날씬한 편으로 균형이 잘 맞으며, 옷은 몸에 얇게 밀착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사실적이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조각수법이 뛰어난 불상이다. 이 보살상은 삼굿시대 후기 금동보살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지며 7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을 추정된다.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184호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에서 공사를 하던 중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을 향해 꼿꼿이 선 보살상은 머리에 꽃으로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에는 둥근 테두리 안에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약간 길고 네모진 얼굴은 엄숙한 표정을 띠며, 어깨는 넓은 편이어서 근엄하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길고 굵은 목에는 복잡한 구슬 장식의 목걸이가 걸려 있고, 어깨로부터 늘어진 목걸이는 배부분에서 X자를 그리며 교차한다. 또 목걸이 장식의 연결부분마다 또다른 구슬을 걸쳐 매우 번잡하게 나타냈는데, 신라시대 보살상으로는 드물게 많은 장신구를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오른손은 내려서 구슬장식을 가볍게 잡고 있으며, 왼손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갔으나 정병(淨甁)과 연꽃가지를 들고 있었던 것 같다. 현재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없어진 상태인데, 머리 뒤에는 광배 꼭지가 남아 있으며 발 아래에는 대좌에 꽂기 위한 기둥모양의 촉(觸)이 높게 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며, 중국적인 요소가 강한 복잡하고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이 매우 특이한 이 보살상은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 금동보살상으로서는 유례가 드문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출처:문화재청>


관음보살, 국보 184호, 경북 구미 봉한동, 신라 7세기


국보 184호로 지정된 관음보살상. 금동여래입상과 함께 발견된 2점의 금동보살입상 중 하나이다. 보살상은 머리에 꽃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편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복잡하고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이 특이한 보살상으로 삼국시대인 7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영주 숙수사터, 신라 6세기)


부처(영주 숙수사터, 신라 7세기)


보살(영주 숙수사터, 통일신라 8세기)


부처(경북 영주 숙수사터, 신라 7세기)


관음보살


영주 소수서원 입구에 남아 있는 옛 숙수사 절터 당간지주


양천동, 신라 7세기),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을 빰에 댄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명상에 잠기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6~7세기에 유행하였다.


부처(김천, 통일신라 8세기)


약사불(대구 도동, 통일신라 8세기), 약사불은 모든 질병을 치료해주고 온갖 번뇌를 없애주며, 무지의 병까지 고쳐주는 등 인간 생활 전반에 이익을 주는 부처이다. 왼손에 둥근 약단지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표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약사신앙이 유행하였다.


보살(청도, 통일신라 8세기)


부처(칠곡, 통일신라 8세기 후반)

불교조각
불상은 불교교리에 의한 예배의 대상을 시각적인 조형매체로 표현한 것이다. 넓게는 부처(여래)는 물론 보살, 나한, 신장 등을 모두 포함하며, 좁게는 부처의 상만을 가리킨다. 삼국 중 불교 수용이 가장 늦은 신라에서는 7세기에 이르러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조상 활동이 성행하였다. 반면 당시 불교문화의 선진이었던 고구려와 인접한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이 발견된다. 이러한 지역성은 통일신라 초기까지 이어져 봉화 북지리 마애불좌상과 석조반가사유상,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 군위 삼존석불 등 고식 불상들이 만들어져 전해져 오고 있다. 삼국통일 이후 왕경을 중심으로 불상제작이 더욱 활발해지고, 8세기에 이르러 종래의 생동감과 종교적인 아름다움이 줄어드는 대신 장식성이 증가하는 등 전반적으로 조형미의 쇠퇴가 눈에 띈다. 또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과 촉지인의 약사불 등 새로운 형식의 불상과 철불이 등장한다. <출처:대구박물관>


비로자나불(경북 영양, 통일신라 9~10세기), 비로자나불은 태양의 빛처럼 불교의 진리가 우주 가득히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화엄경'에 의거하여 부처 모습에 지권인의 손 모양을 한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불상으로 탄생시켰다. <출처:대구박물관>


나한(경북 김천, 고려 14세기),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로 부처의 가르팀을 깨달은 성자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나한신앙이 성행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전통은 지속되었다. 조각상으로는 10대 제자상과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이 가장 많이 만들어졌다. <출처:대구박물관>


관음보살(고려말 ~조선초), 부처의 자비심을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줄임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관에 화불이 있고 정병을 든 모습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중국 원나라 라마불상 양식의 영향으로 화려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제작되었다. <출처:대구박물관>


보살(경북 예천 와룡동, 고려말 ~ 조선초 14~15세기)


아미타불(경북 칠곡 천주사, 조선 1482년) 1482년 정수사에서 관음보살, 지장보살과 함께 삼존상으로 제작된 아미타불이다. 1720년(영조5)에 팔공산의 대장사 운수암에서 수리하여 다시 천주사로 옮겨졌다. <출처:대구박물관>


반가사유상(경북 안동 옥동, 신라 7세기)


부처, 경북문경, 통일신라 7세기말


두 부처, 청송 대전사, 통일신라 말 ~ 고려초, 10세기

의성 관덕동 석사자, 보물 202호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 제188호)의 기단(基壇) 윗면에 배치되어 있던 네 마리의 사자상 가운데 남아있는 사자상 2구이다. 한 쌍은 1940년에 분실되었고 나머지 한 쌍만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구 모두 조각수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닳아 있다. 암사자는 앞발을 곧게 세우고 뒷발은 구부린 자세로 앉아있다.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며 굵은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남아 있어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장식을 연상하게 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배 밑에 세 마리의 새끼 사자가 있고 그 중 한 마리는 어미젖을 빨고 있는 희귀한 모습이다. 수사자는 암사자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며,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향하고 있어 암수가 서로 마주보는 배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성연대는 의성관덕동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9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세부의 수법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있고, 양쪽 발과 앞가슴의 근육 등에서 힘찬 조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


사자, 보물 202호, 의성 관덕동, 통일신라 9세기,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보물 188호) 기단 네 모서리를 지키던 석상이다. 사자는 불법을 지키는 수호상으로 불상의 대좌나 탑, 석등, 승탑 등 불교와 관련된 석조물에 많이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