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28세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초계문신으로 발탁되고, 수원화성 축조에 서양식 축성법인 거중기를 제안하는 등 관료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다산의 관료로서의 업적도 매우 뛰어났지만, 그는 정조 사후에 집권세력의 공격을 받아 전남 강진에서 18여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를 대표하는 많은 저술을 남기고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보낸 강진은 그의 외가인 윤선도와 윤두서 일가가 터를 잡고 있는 지역으로 외가 친척의 도움을 받으며 다산초당에서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강진에서 대표적인 저술인 형사사건 처리 지침서라 할 수 있는 , 양전..